나홍진 감독은 전날밤 적지않게 과음한 눈치였다.
푹 눌러쓴 모자에 바늘처럼 꼿꼿하게 일어선 수염, 그리고 담배연기에 섞인 알콜의 흔적이 격전을 벌였을 증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홍진 감독은 "어제 '추격자' 배우들과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대형 신인감독이 탄생했다는 평단의 한결 같은 칭찬에 흥행몰이까지, 그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일 터였다. 인터뷰 중에도 쉬지 않고 휴대전화는 울려댔고, "감사합니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며 "꿈에도 영화 내용이 나온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데스노트L'를 보고 잊으라고 하세요"라며,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다고 해요"라고 하면 "'6년째 연애중'도 재미있어요"라며 농을 치던 나홍진 감독. 막 데뷔한 신인감독이라기에는 큰 여유가 느껴졌다.
하지만 찬찬히 속내를 들어보자 "요즘 많이 혼란스럽고 마음이 정리가 안된다"는 답이 나왔다. 2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나홍진 감독을 만났다.
-관객의 반응이 대단하다. 자부심도 생겼을 법한데.
▶보시는 분들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찍으면서 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그런 게 생겼다. 프로페셔널한 사람들과 일하면서 나 스스로 성장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미국드라마 '24'처럼 속도감 있는 연출이 호평을 받았다. 영향을 받았는지.
▶'24'는 분명히 내가 본 작품이다. 그 작품을 봤으니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았지 않을까.
-탄탄한 시나리오가 영화 완성도에 부합했다는 평이다.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
▶나를 포함해서 작가 4명이 이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이 작품은 서로가 자기가 썼다고 이야기할 만한 자격이 있다. 영화는 공동작업이므로.
-'완벽한 도미요리', '한' 등 독립영화로 유명세를 얻었는데 그 작품들과 '추격자'는 사뭇 다르다. 왜 이 작품으로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했나.
▶위험요소가 큰 시나리오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짐작은 했는데 촬영에 들어가보니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더라. 밤 촬영에 비 촬영까지. 살인이라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그리고 싶었다.
-살인마가 주택가에 산다는 설정이라 촬영 협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서울 여러 곳에서 촬영을 했는데 잘사는 동네에서는 별로 항의가 없었던 것 같다. 각 동네마다 특색이 있었다. 민원도 많았고. 서울을 하나로 축소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곳을 오가며 수직으로 서울을 그려냈다. 단편영화 찍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서 '상업영화 왜 그래'라면서 궁시렁거리기도 했다.
-경찰을 무기력한 공권력으로 그려 촬영 협조를 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
▶경찰 협조는 사실 많이 받았다. 제작부에서 노력을 많이 했다. 지구대에서 나흘 동안 촬영하기도 했다.
-유영철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담았다. 적잖은 부담이 있었을 텐데.
▶물론 그렇다. 영화를 보시는 분들 중에 그 사건에 관련된 분들이 있을 지도 모르지 않나. 그 분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게 사실상 영화 컨셉트였다. 매 장면 거기에 대한 부담을 잊은 적이 없다.
-영화에 보면 기독교적인 상징이 많이 등장한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지.
▶서울 밤하늘 어디를 보더라도 모든 동네마다 십자가가 있지 않나. 십자가가 걸려있는 주택가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그리고 싶었다. 어거지를 좀 보태자면 모든 살인은 십자가 아래서 벌어지고 있다. 나도 기독교 신자이다. 종교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촬영 환경이 열악해 고생이 심했을 것 같은데.
▶우리는 가난하다라는 생각을 늘 했다. 그런 헝그리 정신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촬영감독과 이렇게 이야기했다. '멈추지 맙시다. 이 분들이 걸어도 우리는 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일한다고 착각하지 맙시다'고. 스태프들의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들은 그 이상의 퀄리티를 만들어줬다. 오히려 스태프들은 최상의 영상을 만들었는데 우리 영화는 어두워야 하지 않겠나며 일부러 수준을 낮추도록 했다. 배우들도 폭발하는 연기보다는 많이 억제하도록 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했다.
▶캐릭터의 구축은 상당 부분 배우들의 공이다. 나는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글로 써있는 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도 모른다. 살인마의 캐릭터는 온전히 하정우의 공이고, 악덕 포주 역시 김윤석 선배의 덕이다.
-왜 꼭 몸 파는 여자가 피해자로 등장해야 하냐는 시선도 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백주대낮에 주택가에서 살해된 여자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유영철 사건 때였다. 술을 마시는데 뒷자리에서 피해자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다. 마치 그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그런 시선들에 대해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영화에 그 분들이 일하는 장면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사람도 이 영화를 보면서 피해자가 끝까지 죽지 않기를 바라도록 하고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고통이나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많다. 혹시 단편영화로 다시 돌아가나.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단편영화는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영화제 등으로 한정돼 있지 않나. 운이 좋아 나는 다른 감독들보다 먼저 상업영화를 찍게 됐다. 단편영화를 정말 찍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끼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상업영화를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요즘 여러 가지 생각에 혼란스럽고 아직 정리가 안됐다. 그냥 지금은 '추격자'에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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