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아이콘 코너의 첫 아이콘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장수했던 에로 주인공인 '애마부인'이다. 과거 '자유부인'의 전통을 이으며 동시에 이후 '젖소부인'이 탄생하는 데 가교 역할을 했던 '애마부인'은, 한국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원한 히로인이다.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02)을 보면 주인공 김득구(유오성)가 연인(채민서)과 함께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있다. 요즘이야 심야에 영화관을 찾는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1982년은 달랐다. 이때 그들이 보던 영화는 바로 '애마부인'. 5공 정권의 3S 정책에 힘입어 등장한, 한국영화 최초로 심야상영을 했던 영화다.
당시 흥행 성적은 서울에서만 31만 명. 요즘으로 치면 전국 300백만 명 이상에 필적하는 대단한 성적. 하지만 1996년까지 총 13편이 나온 '애마부인' 시리즈의 진정한 성과라면, 한국영화사에 남긴 '애마'라는 굵직한 에로 히로인 캐릭터다.
요즘 관객 중에, 생긴 지 사반세기가 넘었고 멸종한 지 10년이 지난 '애마부인' 시리즈를 본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스토리만 놓고 본다면 '애마부인' 시리즈는 말그대로 천편일률적이다. 이 영화엔 공식이 있다. 먼저 (이)애마라는 여성은 30대 초반 정도의 유부녀다. 그녀는 남편의 불륜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다. 이때 애마는 우연히 연하의 남성을 만나거나 옛 애인을 만난다(둘 다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 남자(들)과 애마 또한 외도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애마부인' 시리즈는 1950년대에 나왔던 '자유부인'(56)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영화일 것이다. '자유부인'의 '부인'은 춤바람이 나 가정을 잠시 버리지만, 결국 눈물로 뉘우치고 남편과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물론 애마부인도 가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몸만 돌아갔을 뿐, 더 이상 그녀의 마음속에 '가정'이라는 개념은 없다.
'1대 애마' 안소영을 낳았던 '애마부인'(82)에서 애마는, 더 이상 남편은 필요없다는 듯, 남편을 위해 했던 화장을 지운다. 오수비를 낳았던 '애마부인 2'(83)의 애마는 "남자들이 쉽게 여자를 사귀듯이, 여자도 그래요"라고 당당해 말한다. 김부선(당시는 '염해리'라는 예명 사용)를 스타덤에 올렸던 '애마부인 3'(85)의 애마는 과감한 마스터베이션 장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한 명의 독특한 캐릭터는 애마의 친구인 에리카다. 비음이 독특한 배우 김애경이 맡은 에리카라는 캐릭터는(목소리는 '카리스마 보이스'로 유명한 대배우 박정자 선생이 더빙했다), 당시 영화로서는 파격적으로 강한 레즈비언 필을 풍긴다. 이혼녀이며 소설가인 에리카는 말한다. "애마야, 제발 그런 봉건적 사상 좀 버려."
애마를 해방시키려는 에리카의 노력은 2편에서 더욱 강렬한 동성애적 장면을 연출하는데, 애마(오수비)는 "이제 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라며 에리카와 커플이 되어 광란의 축제 속으로 뛰어든다.
가정 주부로 시작했던 애마의 캐릭터는 이후 직장 여성을 거쳐 무용가나 대학 강사, 심지어는 누드모델까지 발전(?)한다. '안소영-오수비-김부선'이라는 애마 트로이카를 낳았던 시리즈는 4편부터 정인엽 감독이 메가폰을 놓으면서 조금씩 하향세에 접어들었지만, 그리고 극장용에서 비디오용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15년 가까이 이어지며 13편의 '애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후 정인엽 감독은 '파리애마'(88)와 '짚시애마'(90)을 통해 '애마의 국제화'를 시도했고, 1997년엔 '애마부인의 딸'이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개인적으로는 '엠마누엘'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애마'라는 이름은 원래 '애마'(愛馬)였으나 '말을 사랑한다'는 뜻이 너무 음란하다는 심의 당국의 압력으로 '애마'(愛麻)로 바뀌었는데…. 뜻을 풀어보니 '대마초를 사랑한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김형석 월간스크린 기자>
<저작권자 © ‘리얼타임 연예스포츠 속보,스타의 모든 것’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