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엄마가 뿔이 나면? 받아줘야지 뭐 어떡하겠어", "가장 나를 닮은 배역? 다 백일섭인데 내가 아닌게 어디있나."
그였다. 푸근하고 친근한 사람, 조금은 고집스럽지만 유쾌한 사람. TV를 통해 수없이 보았던 '우리들의 귀여운 아버지' 백일섭이다.
지난 15일, "촬영준비를 하다가 나왔다"며 TV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편한 옷차림으로 등장한 백일섭을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만났다.
"멋지게 나이드신 것 같다", "여전히 동안이다". 백일섭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는 말에 꼭 좀 전해달라던 지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하" 호탕한 소리와 함께 예의 그 귀엽기까지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고민꺼리 가지고 오래 끌고 가고 싶지 않다. 여가시간이면 골프 치며 웃고 좋아하는 술 마시고, 좋은 사람 만난다. 그리고 일할 때는 또 열심히 일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지 사업이라도 크게 해야지 하면 확 늙는 것 같다"
그래서인가. 그는 매니저도 운전기사도 없다. 모든 스케줄을 혼자 관리하고 언제 어디를 가든지 직접 운전을 한다. 피곤하고 힘들 법도 하지만 그는 혼자가 편하다고 말한다.
"매니저 두면 먹여 살려야하는데 그럼 그만큼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충분히 내가 운전해도 되고 내가 즐길 수 있는데 뭐하러 일을 벌리겠는가. 난 일 많이 하는 것도 싫다. 있는 만큼만, 더 욕심 부리고 싶지 않다"
"적게 먹으면 그만큼 적게 싸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농담을 던지며 크게 웃는 모습에 '선생님'을 만난다는 긴장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되레 너무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습에 '아버지~'라 외치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야 했다.
"난 늘 연기보다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으로서 살려고 한다. 그래서 대본도 열심히 본다. 한시도 대본에서 눈을 안 뗄 만큼. 대사를 외우는 것도 외우는 거지만 외우기보다 소화시키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늘 그의 전부 혹은 일부와 함께 했으니 만큼 실제로는 처음 만나는 그지만 유별나게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백일섭은 오랜 배우생활만큼 연기에 대한 생각도 확고했다.
"요새 유행하는 퓨전사극은 진솔한 내용을 담을 수 없으니 눈요기 정도인 것 같다. 드라마란 현실을 담고 현실의 내용을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연스러움, 진솔함. 배우 백일섭과 얘기를 나누던 시간 동안 가장 많이 등장했던 단어다.
그런 백일섭이 요새는 KBS '엄마가 뿔났다'(극본 김수현ㆍ연출 정을영)와 MBC '달콤한 인생'(극본 정하연ㆍ연출 김진민)으로 두 가지 인생을 살고 있다.
"두 명의 삶을 사니 힘들다. '엄마가 뿔났다'는 역무원, '달콤한 인생'은 형사. '달콤한 인생'에 출연 장면이 많았다면 못했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 백일섭이 사는 것이니 만큼 캐릭터의 차별성에 대한 발언도 없진 않다.
"아내는 '달콤한 인생'을 보더니 말을 좀 달리 할 수는 없냐고 묻더라. 근데 형사 말투가 따로 있나? 난 그런 거 모르겠다. 형사도 사람으로서 생활이 있는 건데. 사람 보는 눈이 예리한 것은 있겠지만 검정 안경이나 쓰며 티를 내는 것은 싫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역시 백일섭이구나' 싶었다. 드라마 속 인물들로 익숙히 보았던 모습이 '사람' 백일섭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첫 단계는 뭐든 인간미 있는 인물이다. 물론 '엄마가 뿔났다'에 백일섭을 많이 접목시키지만 그렇다고 '달콤한 인생'에서 백일섭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백일섭이 형사가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니 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닌가. 기본은 백일섭으로 놓고 조금씩 캐릭터에 따라 변화를 주는 것이다."
"다른 누가 아니라 언제나 나였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시청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던 '엄마가 뿔났다' 극 중 딸 영미(이유리 분)를 시집보내며 눈물 흘리던 모습이 겹쳐들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어느 자식을 결혼시키던 다 마찬가지다. 드라마 속이지만 드라마 할 때의 난 드라마 속의 아버지니까. 감정은 아버지로서 다 똑같다. 항상 내 자식 같고. 드라마 속에서만 결혼을 시킨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잘못된 캐스팅인 것이다."
그렇게 치면 백일섭은 늘 적절한 캐스팅, 딱 맞는 위치에서 연기를 펼쳤다고 봐도 좋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어디에나 '최고'는 있는 법, 그에게 있어 최고는 누가 뭐래도 전국민의 히트송 '홍도야 후지마라'를 낳았던 '아들과 딸'(92년 작)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게 언제 일인데 사람들이 아직도 잊어버리질 않는다. 아직도 나만 보면 '아 글씨~ 오빠가 있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들통난 것 하나. 늘 '백일섭'을 기본에 두고 연기가 아닌 생활을 하려한다는 그지만 늘 '홍도야 우지마라'를 입에 달고 살던 극 중 모습과는 달리 백일섭 자신은 노래 부르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엄마가 뿔났다'와는 달리 실생활에서 딸에게 던지는 말이라곤 '잘 잤니', '학교가니' 정도가 전부다.
"애들을 붙잡고 오래 얘기한 적이 없다. 오래 얘기하면 잔소리겠지, 스스로 느끼겠지 생각한다. 엄마가 있으니 괜히 아버지 티내려고 애써 말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는 마음은 크지만 표현은 잘 하지 않는다. 보통 아버지들이 이러니 엄마가 뿔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우리 아버지들의 마음도 딱 저렇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턴가 말수가 좀 적어졌다. 그 전에는 농담도 하고 깔깔거리고 웃고도 했는데 이젠 될 수 있는대로 남 얘기에 안 끼어들고 싶다. 말을 많이 하는 건 내 자랑이던가 남을 헐뜯는 것 같은데 그런 얘기 별로 안하고 싶다."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그 속에서 많은 이의 존경을 받게 된 '명배우' 백일섭이지만 "부족한 자신이기에 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던져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마음에 품고 신념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는 백일섭은 한없이 아버지가 생각나게 하는 '우리들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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