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콕'의 아이디어에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뭔가가 있다.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뒤집어놓았기 때문이다. 유니폼을 입지 않는, 성격이 모난, 알코올 중독인, 사건을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들입다 피해만 만들어내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슈퍼 히어로.
'핸콕'의 도입부에도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슈퍼맨은 연인 로이스를 발등에 얹고 새털이 허공을 떠다니듯 부드럽고 로맨틱하게 날아오르지만, 핸콕이 날아오른 자리에는 반드시 파편이 나뒹군다. 슈퍼맨은 한쪽 팔을 앞으로 뻗는 멋진 자세로 광속을 넘나들지만, 핸콕은 저러고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행 자세가 구부정하다.
스파이더맨은 공중제비를 돌며 빌딩 사이, 심지어 철교 사이를 날아다니지만, 핸콕은 장애물을 피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나 장애물일 뿐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핸콕이 한번 떴다 하면 주위가 온통 쑥대밭이 된다. 핸콕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은 우리가 상상해온 슈퍼 히어로의 활약은 아니지만 그래서 통쾌한 구석이 분명 있다.
피터 버그가 만들어내는 영상에는 아주 매력적인 뭔가가 있다.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겠지만, 어쨌든 클로즈업을 적절히 구사하는 연출은 감독으로서 그의 재능을 느끼게 해준다(피터 버그는 원래 배우 출신이다).
여기가 영화가 시작하고 30분까지다. 핸콕이 어떤 녀석인지, 어떻게 도시를 망치는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껏 매력적이라고 말한 것들이 이 30분 동안 유감없이 실체를 드러낸다.
이 지점을 지나면서부터는 핸콕이 어쩌다 저리 됐는지, 어떻게 위기를 맞는지, 그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는지 설명돼야 한다. 그 설명이 유쾌하거나 감동적이어야만 ‘사람을 매료시키는 '핸콕'의 아이디어’가 결실을 맺을 것이다.
다만 그 덧붙인 뭔가가 아이디어의 매력을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로 엉터리였으니 문제다. 그게 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핸콕의 탄생과 관련된 이 설정은 나름대로 '핸콕'이 비장의 무기로 내세우는 반전이기 때문이다. 이 반전에 탄복하는 자, '핸콕'에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겠지만, 생각건대 그런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음란서생'에서 윤서(한석규)가 자기 책의 모자란 부분을 묻자 황가(오달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뭔가 젠체하는 구석이 있다고나 할까?”
젠체한다고 해서 잘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원래 잘나야 잘나 보인다. 섣불리 젠체하면 오히려 거부감만 부를 뿐이다. 아이디어라는 구슬을 순수한 마음으로 꿰었다면 보배가 됐겠지만 '핸콕'은 거기에 신과 천사의 이야기를 끌어다대고 불멸과 죽음을 이야기하려 했다. 나는 그게 젠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삐딱한 슈퍼 히어로와 진중한 ‘신화’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걸 억지로 이어 붙이려 하니 그게 젠체하는 게 아니고 무엇일까.
'매트릭스'가 재미있는 것은 성서 이야기를 재해석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야기와 영상 자체가 멋들어지기 때문이다. 성서를 탁월하게 재해석했다는 찬사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고서야’ 뒤따르는 부산물일 뿐이다. 걸작은 그 앞과 뒤를 잘 살펴야 꿰어낼 수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핸콕'이 아쉬운 것은, 그 앞뒤도 모르고 젠체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애스 홀’이라는 욕을 들으면 돌아버리고 ‘크레이지’라는 말만 들으면 분노가 치민다는 설정, 너무 구닥다리 아닌가?
<김유준 에스콰이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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