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광정, 단역에 혼을 담은 우리시대 진정한 배우

전형화 기자  |  2008.12.16 09:58


말기 암도 의지를 꺾지 못했던 열정의 배우 고 박광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연기 열정을 감추지 않았다. 고인은 올해 2월 인기 속에 막을 내린 MBC '뉴하트'에 지성의 조언자이자 조재현의 친구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지난 3월 폐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연극 '서울노트'를 연출하는 등 병마에 굽히지 않았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고 박광정은 92년 연극 '마술가게'를 연출하며 연출자로 이름을 먼저 알렸다. 연극무대에서 연출자와 연기자로 활약하던 고인은 94년 차인표 신애라 주연의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 출연, 특유의 코믹 연기를 대중에 선보였다. 그 후 고 박광정은 안방극장에서 늘 청량한 감초 역할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고 박광정의 진면목을 대중에 온전히 전하려 한 곳은 영화쪽이었다.

고 박광정은 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맞아 봇물처럼 쏟아졌던 새로운 작품들에 빠지지 않았다. '홀리데이 인 서울' '박대박' '자귀모' '명자 아끼꼬 쏘냐' '비명도시' 등에 작지만 인상 깊은 연기로 족적을 남겼다.

마른 체구에 어딘지 모를 그늘이 어린 고인의 모습은 작은 일에 절망하는 소시민과 힘없는 지식인에 적합했다. '세상 밖으로' '꽃잎' 등에서 그는 절망하면서도 분노를 내뱉지 못하는 우리시대 아픔을 대변했다. 영화 속 그는 TV와는 달리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에 고인이 출연했던 것은 '박광정'이라는 배우가 시대의 아픔을 늘 호흡하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07년 마침내 첫 주연을 맡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국제이머징탤런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그의 품에 안겼다. 당시 고 박광정은 고개를 긁적이며 "주연이라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웃음이었다.

고 박광정은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오가면서도 본령인 연극무대를 결코 잊지 않았다. 쉼 없이 연출과 기획에 힘썼으며, 연극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고인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울노트' 연출에 매진했던 것은 마음의 고향이 바로 연극무대였기 때문이었다.

고 박광정은 웃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새겨있는 우리시대의 크라운(광대)이었다. 관객을 웃고 울리지 못하면 사자 밥이 될 각오로 연기에 임했던 혼의 연기자였다. 작은 역에 혼을 불어넣었던 고인은 천국에서도 천사를 상대로 웃고 울릴 것이 분명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 박광정 영정 ⓒ홍봉진 기자 hong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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