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에 출연한 것을 처음으로 무려 5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단역에 불과했던 작품도 다수다. 그는 그만큼 작품에 출연하는 데 있어 비중을 따지지 않았다. 코믹하고도 인간미 넘치는 감초 조연으로, 힘없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시청자와 관객들을 만났다.
작품 속 그의 몇가지 모습을 꼽아봤다. 가장 가슴이 아픈 건, 이젠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그런 거야?"(사랑을 그대 품안에, 1994)
1992년 연극 '마술가게'를 연출하며 연출자로 먼저 이름을 알린 고 박광정은 1994년 차인표 신애라가 주연을 맡은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통해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연극 배우의 감초 조연이 드물던 시절, 고 박광정과 권해효가 펼친 콤비 코믹 연기는 장안에 화제가 됐다.
두 사람은 신애라과 차인표가 근무하는 백화점 매장 직원으로 곳곳에 등장하며 극의 재미를 부각시켰다. 이후 드라마 '미스터 큐' 등 다수의 인기 드라마에서 박광정은 극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특별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스터 큐'에서처럼 악인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마지막 작품이 된 '뉴하트'에서처럼 인간미 넘치는 착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180도의 캐릭터를 오가는 중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나는 디테일한 연기였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이후 14년, 지금은 고 박광정이 등장하는 스틸 사진 한 장조차 찾기가 어렵다는 점은 안타깝다. 조연은 물론 단역조차 마다않는 진정한 광대였던 고 박광정은 그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람보가 아니라 랭보입니다." (넘버3, 1997)
송능한 감독의 1997년 영화 '넘버3'은 3류들을 다룬 색다른 풍자 코미디다.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이미연 등 화려한 출연진의 파격적인 변신, 감칠맛 나는 대사 등으로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작품. 그 속에서도 고 박광정의 모습은 빛났다.
고 박광정은 조직폭력배와 검사, 술집 마담이 가득한 이 작품에서 순수한(?) 영혼을 지닌 시인 랭보로 출연, 지식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코믹하게 풍자했다. '세상 속으로', '꽃잎' 등에서 보듯 마른 체구, 웃음 속에서도 슬픔이 배어나는 그의 모습은 힘없는 소시민과 지식인을 표현하는 데 적격이었다.
'넘버3'에서는 몸에 맞지 않는 듯한 양복을 차려입고 치렁치렁한 퍼머 머리를 뒤로 넘기는 모습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냈다. 무식하고 폭력적인 조폭들에게 질린 영화 속 여자들은 "요즘 시대가 개가 소를 베끼고 소가 개를 베끼는 시대라지만 시인은 그래선 안됩니다"라는 랭보에게 묘하게 빠져들고, 랭보도 조폭 한석규의 연인 이미연에게 흑심을 품어본다. 현장을 들켜 조폭 보스의 아내 방은진에게 발목 잡힌 신세가 되고 말지만.
◆"아무래도… 아내가… 바람이 난 것… 같습니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1997)
그 남자는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하기로 했지만, 이 남자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김태식 감독의 블랙코미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고 박광정은 그 불운하고도 소심한 남자 태한이 됐다.
그의 힘없는 소시민 연기는 빛을 발한다. 불륜 현장을 직접 확인하려고 아내의 상대인 택시기사의 차에 올라탔다가 "불륜은 없고 사랑만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씁쓸하게 분을 삭이는 그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안쓰럽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된 뒤에도 우여곡절 끝의 복수에 통쾌해하기보다는 되레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것도 소심하게.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고 박광정의 첫 주연작이다. 이 영화로 그는 국제 이머징탤런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당시 그는 "주연이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며 겸손해했다. 그리고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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