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복수를 버리고 구원을 택한 박찬욱표 흡혈귀 이야기

전형화 기자  |  2009.04.24 18:11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마침내 전모를 드러냈다. ‘박쥐’는 복수라는 테마에 사로잡혔던 박찬욱 감독이 구원에까지 손을 뻗친 작품이다.

24일 오후 서울 용산CGV는 ‘박쥐’ 기자 시사회에 참석하려 온 사람들로 가득찼다. 2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사실이 아니더라도 ‘박쥐’가 올 상반기 가장 화제를 모은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극장 사정으로 예정시각보다 20여분 늦게 시사회가 열렸지만 여느 시사회라면 터졌을 불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 김옥빈 등이 시사회에 앞서 무대인사를 위해 내려올 때 사진 기자들이 계단부터 그들의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 역시 여느 시사회라면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2시간 여 동안 진행된 시사회는 바늘 하나가 떨어지면 누구나 알아차렸을 정도로 내내 고요했다. 강요된 침묵. ‘박쥐’는 관객에 낯설음으로 거리를 두되 기꺼이 그 여정을 동참하도록 하는 영화다.

‘이브’라 불리는 질병을 고치기 위해 신약 실험에 자원한 신부는 죽음에 도달했으나 흡혈귀의 피를 수혈받아 부활한다. 흡혈귀의 피는 초인적인 능력을 신부에 선사하나 신선한 피가 수혈되지 않으면 다시 ‘이브’의 영향을 받아 살이 썩는다.

흡혈귀의 피로 욕망에 눈을 떴으나 그 욕망에 거리를 두려 하는 신부는 어느 날 우연히 병에 걸린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친구의 부인은 신부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의 죽음을 사주한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피를 부르게 되고 신부는 갈등에 빠진다.

‘박쥐’는 피와 복수가 만연했던 박찬욱 월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영화다.

복수3부작을 통해 신의 것으로 여겨지던 복수를 인간의 것으로 만들었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신의 것으로 여겨지던 구원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구원은 나의 것으로 변모를 꾀한 것이다.

‘박쥐’는 뱀파이어 영화의 외피를 둘렀으나 성경에 더 많은 빚을 졌다. 신에게 봉사하는 사제가 맞서려 했던 질병은 ‘이브’다. 아담을 유혹한 최초의 여인의 이름이다. 흡혈귀가 된 신부가 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질병이 아담을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한 여인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 곧 ‘박쥐’가 지향하는 바다.

흡혈귀가 된 신부는 친구의 여인을 만나면서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신의 가르침을 어기게 된다. 작가 박찬욱은 스스로 즐겨 그리는 딜레마에 빠진 인물을 통해 신과 인간의 길에서 선택을 요구한다. 가톨릭에서 대죄로 여겨지는 자살이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신부가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환자들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보단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결별, 혹은 해방시키는 것도 ‘박쥐’가 구원이 신에 있지 않고 인간에 있음을 역설한다.

화면을 한 뼘 더 넓히는 미쟝센으로 정평난 박찬욱 감독은 ‘박쥐’에서 예의 실력을 십분 발휘한다. 피로 대변되는 붉은 색과 집에 칠해 놓은 하얀색은 영화에 또 다른 상징으로 남는다. 장미보다 더 붉고, 백합보다 더 하얀, ‘박쥐’의 미술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사제를 맡은 송강호는 그만의 체취를 ‘박쥐’에 남긴다. ‘박쥐’가 심각한 분위기에서 간혹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오로지 송강호의 공이다. 이브를 유혹하는 뱀, 혹은 아담을 유혹하는 이브 역을 맡은 김옥빈은 세상일에 처연한 여인에서 팜므파탈로 진폭이 큰 연기를 잘 소화해냈다. 두 사람의 베드신은 ‘박쥐’에 쉼표보단 느낌표 역할을 한다.

‘박쥐’는 ‘올드보이’보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멜로가 본격화됐으며, 구원을 보다 명징하게 이야기한다. 박찬욱이라는 작가가 그리는 또 다른 여정이 궁금한 이에겐 필견인 영화다. 3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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