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견' 김태현 "'하얀 거짓말'로 기회 얻어 "(인터뷰)

김현록 기자  |  2009.07.17 08:18


'하얀 거짓말'은 끝났지만 그 여운은 끝나지 않았다. 천사같았던 자폐아 형우의 여운도, 그를 가슴 아프게 연기했던 배우 김태현의 여운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아침드라마의 블록버스터, 최근 종영한 MBC 아침드라마 '하얀 거짓말'(극본 조은정·연출 배한천 이민수)은 탄탄한 구성, 연기의 맛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신은경과 김해숙은 제 몫을 톡톡히 하며 무게를 과시했다. 그러나 이들에 못잖은 김태현의 열연은 주부 팬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이었다. 그야말로 '김태현의 재발견'이다.

빗줄기가 가신 어느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태현은 드라마 속 강형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쓸쓸했던 눈은 생기발랄하게 반짝였고, 창백해 보였던 피부도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그것이 강형우가 아닌 김태현의 모습이었다.

2001년 MBC 공채탤런트로 데뷔한 지 9년째.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제 몫을 하는 배우였지만, 이처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태현은 "역시 인기 드라마를 하니까 인지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 작품 하나로 내가 막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만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갈고 닦은 배우들에게 기회를 줘도 된다"고 아쉬움을 털어놨다. 오랫만에 찾아온 기회를 붙잡아 맘껏 자신을 펼쳐보였던 그, 그러나 김태현에겐 아직 더 많은 것이 남았다.

-8개월만에 드라마가 끝났다. 시원섭섭한가?

▶사람들한테는 장애인 역 벗어나서 시원하다고는 하는데, 섭섭하긴 하다. 욕심나는 캐릭터를 맡아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한다. 후회는 없지만 어떻게 안 섭섭하겠나.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니 주위 반응이 어떤지.

▶정말 완벽한 인지도를 얻었다고 해야 되나. 예전에는 마니아만 아는 배우였는데 지금은 너무 알아보시니까 부담될 정도다. 얼마 전 대구 시장에 갔다가, 내가 한류스타가 된 줄 알았다.(웃음)

원래 드라마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영화 현장에선 감독과 오래 상의를 해서 뭔가를 만들어 가는데 드라마는 그렇질 못하니까 답답하지 않나. 끝도 모르면서 연기해야 하고. 그런데 이번에 그 힘을 제대로 알았다. 시청률 10%면 4500만이 보는 건데, 우리 드라마는 1000만이 본 거다. 그것도 매일매일.



-캐스팅은 어떻게?

▶전작이 아침 드라마라 정말 안하려고 했다. 사실 드라마에도 등급이 있다. 미니시리즈가 최고, 주말극, 일일극… 아침드라마는 꼴찌다. 그런 차별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나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는 무조건 한다. 나를 찾아주시는 분과도 마찬가지다. 배(한천) 부장님이 그랬다. 저에 대한 확신이 있으시더라.

-재활원에 다니며 연기 연습을 했다는데.

▶알려진 게 조금 다르다. 부장님과 재활원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긴 했다. 그런데 오래 못하겠는거다. 마치 내 기운이 다 빠지는 느낌? 결국 못하겠다고 하고 내 머리로 형우를 그렸다. 더스틴 호프만의 '레인맨'도 보고 했지만 남들이 하는 연기를 하고싶지 않았다. 원래 장애인 역이 욕심나는 역 아닌가. 나는 장애인 강형우가 아니라 인간 강형우를 그리겠다고 답을 내렸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형우가 자폐아가 맞는거야?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걸 노렸던 것 같다. 모든 걸 복합적으로 해놨기 때문에 그 뒤의 일들이 합리화된다. 그저 자폐아였다면 마지막 엄마를 떠나보내는 형우의 눈빛이 나오겠나. 평소에 연기할 땐 슛 들어와도 그냥 딴짓하고, 초점 없이 바라보고 그랬다. 그게 오히려 공감을 자아낸 것 같다.

-어머니 역할 김해숙씨와의 호흡도 좋았다.

▶엄마는 너무 궁합이 잘 맞았다.(그는 녹화를 하지 않을 때도 김해숙을 엄마라 부른다.) 내가 엄마 아들 리스트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신난다. 아주 계보가 화려하다. 원빈, 김래원, 소지섭 등등.(웃음)

-실제 김태현은 강형우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현장에선 어땠나?

▶순간 몰입형이라고 해야되나. 원래 슛이 들어가면 집중력있게 연기하는 편이다. 대본을 받으면 깊이 정독을 하고 안 본다. 대본만 열심히 외우면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으니까. 현장에선 오히려 더 밝게 지냈다. 8개월을 거기에 빠져 있으면 우울증 걸린다. 그런 순간의 변신이 즐겁다.

-팬들이 놀라겠다.

▶팬클럽 모임에 형우를 기대하고 왔다가 깜짝 놀라는 분들도 있다. 실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그게 '사람 괜찮네' 식으로 먹히기도 한다. 원래는 자존심 무지 세고, 욕심도 있고, 좀 다혈질적인 데도 있다. 그런 사람이 자기 모습과는 다른 역을 해야 빛나지 않겠나.

-김태현의 재발견이란 평이 자자하다.

▶우리 드라마엔 스타들이 많았다. 배우 보는 맛이 쏠쏠했다 그런 말이 좋다. 26% 시청률로 끝나 너무 고마운 게, 30%였으면 안 그랬을 텐데 더 욕심이 생긴다. 끝나자마자 태닝하고 모습을 확 바꿔버렸다. 내 욕심은 정말 최고 수준이다. (웃음)


-연기에 대한 욕심 말인가?

▶내 꿈은 정말 연기 잘 하는 배우가 되는 거다. 한계를 시험하고 싶다. 수위 아저씨부터 악한까지 모든 역할을 다 해보고 싶다. 누군가는 이런 내가 부담된다고도 하더라. 하지만 배우가 연기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얀 거짓말'을 해서 정말 기쁜 게 예전엔 나 혼자 연기만 잘 해야지 했다면 이젠 내 다음을 기대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거다.

언젠가 엄마(김해숙)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태현아 너 연기를 정말 잘 할 필요 없어. 그건 기본이야. 너만의 매력을 찾아야지.' 엄마도 그냥 연기만 했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거라고 하시는데,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연기를 잘하고 싶다. 내가 너무 완벽해지려고 해서 사람들이 안 쓴다면? 내 답은, 정말 완벽해져서 날 누군가 쓰게 하는 것이다. 김명민씨를 정말 존경한다. 그분은 정말 연기 하나로 그 자리에 서신 분이다. 대단하다.

-오랜 무명시절을 털어냈다는 시원함도 있겠다.

▶캐스팅됐다 튕겨나가는 걸 직접 당해봤다. 촬영하러 가다가 전화 받고 돌아간 적도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피해의식도 많다. 이번 연기를 하면서 한을 풀었던 것 같다. 내가 뭔가를 맘껏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으니까.

스타들은 실패를 해도 또 기회가 주어진다. 그냥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실패하면 그만이다. 그 기회조차 잘 안 온다. 그러니까 자살 생각하고 그러는 거다.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런 배우들에게 기회를 좀 줘도 된다는 거. 한이 있고, 갈고 닦은 게 있기 때문이다.

-제일 힘들었을 때는?

▶영화 '청연'을 찍을 때다. 2∼3만원 갖고 한 달을 살았다. 제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이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감사하기도 한다. 내가 괜찮은 기획사, 매니저를 만나서 안정적으로 살게 되면 안에 있는 절박함을 표현 못하게 되지 않겠나. 제 힘든 삶이 있으니까 형우라는 캐릭터도 사는 거다.

-특유의 낙천성 때문에 그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

▶물론 그것도 크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던 거다. 정말 큰 의지가 됐다. 내가 배우라는 걸 가장 자랑스럽게 말하시는 분이 우리 엄마다. 하지만 '넌 직업이 특별한 사람일 뿐이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 엄마다.

-'하얀 거짓말'로 한 단계 도약했다. 다음 꿈이 있다면?

▶내 꿈은 그냥 끊임없는 욕심이다. 모든 걸 다 해보고 싶다. 모든 게 지금부터인 것 같다. 제가 '하얀 거짓말'을 했다고 막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강형우란 캐릭터로 남은 거지 그 이상도 아니다. 더 욕심내면 자만에 빠지고, 아무것도 안된다. 내가 좀 더 완벽해지면 그때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아니다. 내게 다른, 뭔가 큰 한 방이 남았다고 믿는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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