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순재(75). 일흔을 훌쩍 넘긴 중견인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진폭을 가진 배우 가운데 하나다. 카리스마 가득한 왕이었다가, 홀로 야동을 즐겨보는 주책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가슴 설레는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에선 흥행보증수표로 불릴 만큼 인기까지 갖췄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연출한 장진 감독이 서민적 대통령을 연기할 인물로, 정치 사극과 시트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를 첫 손에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짧게 진행된 인터뷰지만 받아적기가 힘들 만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이순재에게서는 여전한 활력과 열정이 느껴졌다. 연기는 창조이며 늘 새로운 인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는 이순재. 이번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장동건·고두심과 호흡을 맞춘 그는 244억 로또에 당첨된 뒤 전전근긍하는 서민 대통령으로 웃음과 공감을 전한다. 실제 이순재는 어떨까? 그는 "로또같은 거 한 번도 안했다. 당첨되면 어디 써야지 생각도 안한다. 불가능한 이야기니까"라고 껄껄 웃었다.
-'거침없이 하이킥'도 그렇고 최근 코미디 연기를 많이 했다.
▲ 셰익스피어도 희극과 비극을 다 썼다. 모노드라마나 마임 하는 사람들도 다 희극적 소양이 있다. 희극이란 연기와 함께 시작한 거다. 다만 우리나라가 그런 구분이 심하다. 탤런트, 영화배우, 성우, 뮤지컬배우, 연극배우부터 액션배우, 코미디배우까지…. 하지만 그게 사실은 하나다.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안된다는 건 한국적 모순이다. 이젠 과감히 버려야 한다. 코미디라고 특별히 신경쓰진 않는다. 하나의 연기라고 접근한다.
-장동건과 함께 연기했는데.
▲ 예전에 '의가형제'란 드라마를 했었다. 그땐 '참 잘생긴 청년이 하나 나왔구나' 그랬다. 영화 '친구'를 볼 땐 '몸을 아끼지 않는 친구구나' 그랬다. 젊은 배우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수준의 연기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걱정한 건 지적 표현 수준이 어디까지 가느냐였다. 대통령이란 역할에는 지적 표현이 수반돼야 하니까.
지적 표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언어다. 배우는 표준어를 중심으로 대사 활용의 기본을 다진다. 그런데 요즘엔 말이 어느 순간 많이 상실돼, 젊은 배우들도 치고 박고 싸우는 걸 하면서 지적 수준보다는 동적인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보면 엘리트, 교수 등을 맡았을 때 표현에 취약할 수 있다. 장동건도 대통령 수준의 화법을 어떻게 구사하나 관심있게 봤다. 오늘 보니 그만하면 됐더라. 화법이나 발음, 대사의 악센트가 절절했다. 잘 하는구나 했다. 내가 주인공을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웃음)
-이상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그렸다. 혹 롤모델이 있었나?
▲ 정치적 역정도 그렇고 민주화를 이룬 대통령이라는 설정에서 보듯 양김 대통령과 좀 비슷하다. 제일 중점을 뒀던 건 청렴도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한 대통령이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간 장면이 제일 좋았다. 역사상 그런 대통령이 없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국민과 함께하다 집권하고 나면 국민과 멀어졌다. 국민과 가까워지는 대통령이 뭘까 고민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게 '대통합주의'라는 부분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과 같다. 감독한테도 그 부분을 보고 '오케이, 나 출연한다' 그랬다.
솔직히 대통령이 장사꾼 아닌 이상 무슨 큰 돈이 있겠나. 대통령 되기 전엔 30평 아파트에서 살 수도 있는 거다. 임기가 끝난 다음에 바로 그 자리로 그대로 들어가면 걱정 안해도 된다. 우리 국민들은 감동의 국민들이라 아마 먼저 100칸짜리 집을 지어주자고 할 거다. 어딜 비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아주 소박한 대통령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영부인 역 전양자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등장하는데.
-최근엔 영화를 많이 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영화 출연이다.
▲ 사실 난 영화가 좋아 배우가 됐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거장들의 명작, 명배우를 보면 '이건 예술이다' 그런 충동을 느꼈다. 그건 돈벌이가 아니었다. 인기있다 하지만 그땐 배우가 사회적으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60·70년대엔 톱스타들 소원이 부잣집 시집가는 거였을 정도다.
난 대학 시절 키가 작아 영화를 못 했다. 그때도 이마에 주름이 있고 목소리도 허스키했다. 얼짱이라고 하는데 내가 무슨. 신성일 남궁원이 얼짱이지. 그래서 연극을 하다가 용돈이라도 벌러 TV로 갔다. 많은 오차를 통해 TV에 적응을 했다. 그땐 참 영세하고 취약했다. 요즘엔 많이 전문화가 됐더라. 막내들도 다 영화를 전공했고.
-늘 변화하며 연기를 계속하는 열정은 근원이 있다면?
▲ 연기는 창조 작업이다. 내가 잘 나갔던 배역을 반복하면 우려먹기 아닌가. 1990년대 초 대발이 아버지로 인기가 있었는데 그걸 계속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다. 새 대본을 보고 새 역할을 창조하는 게 내 역할이다. 과거엔 아버지였는데 요즘엔 할아버지가 돼 좀 제한되긴 했지만.(웃음)
보기엔 같아 보여도 연기자 본인은 늘 고민이다. 외모도 달라보이게 하려고 하고. 그게 연기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자 의욕이다. 요즘엔 악역하면 연기가 제한되고 그랬는데 요즘엔 시청자들의 안목이 달라졌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장미희가 악역을 해도 CF는 혼자 해먹지 않나.(웃음) 후배들에게도 적극적으로 하라고 한다. 설익으면 우습다고.
-혹시 더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 이젠 나이가 들어서, 사실 해볼 건 다 했다.(웃음) TV에서 최초의 수사물로 '형사수첩'이라는 게 있었는데 내가 범인을 33회나 했다. 홍은동 소녀 강간치사 사건 이런 것도 있었고…. 다들 안하려고 하기에 내가 하다보니 더 몰리더라.
개인적으로 이제 우리 영화나 TV 드라마도 본격적인 정치 드라마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작품 통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다.
-혹 현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다면?
▲ 주무장관이 현업 출신이라 더 잘 알 거다. 임기 중에 구체적인 기여를 하려고 노력하니까. 특별한 애정을 가진 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퇴임 후에는 살던 집으로 그대로 들어가슈' 그런 이야기를 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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