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가 군대를 다녀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배우 장혁(33)에게서 달라진 향취를 느낀 건. 진한 남자 냄새는 여전했지만 어깨며 눈에 가득 들어갔던 힘이 어느새 빠졌고, 어딘지 더 섬세해졌다. 드라마 '고맙습니다', '불한당', '타짜', 영화 '오감도', '토끼와 리저드', '펜트하우스 코끼리'까지. 2007년부터 쉼 없이 이어지는 작품에서 보듯 배우로서 그의 활동도 더욱 바빠지고 폭넓어졌다.
특히 올해엔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내놓으며 한창 그 피치를 올리는 중이다. 다음 달 개봉을 앞둔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그 마지막 영화. 각기 다른 세 남자의 위험하고도 파격적인 사랑을 담은 이 작품에서 장혁은 지나간 사랑에 집착하는 사진작가가 됐다.
장혁이 이 만만찮은 사랑 이야기에 끌린 건 시나리오의 몽환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댄스 오브 더 드래곤' 촬영차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읽은 시나리오의 마지막 감상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같았다. 장혁은 그 느낌을 몽환적이고 조금은 위험한, 30대로 넘어가는 성장통에 빗댔다. 마음을 굳히게 한 건 장혁을 보겠다며 당장 싱가포르로 날아 온 정승구 감독이었다. 뭔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래서 시작했다. 베드신도 해냈다.
"수위가 많이 높지는 않아요. 필요한 신이라면 해야죠. 사실 살인하는 연기가 잠 한번 자는 것보다 더 무거운 거예요. 그 극적인 걸 해내는 건 작품과 맞고 충분한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고요. 베드신은 말할 것도 없어요. 수위가 더 높다 해도 할 의향이 있어요. 단 조건은 있어요. 이유가 합당하다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할 생각이 없어요."
'나쁜 남자 역은 많이 했어도 사랑에서만은 순정파가 아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장혁은 다만 이기적이었을 뿐이라며 "사랑에 대해서는 순정파"라고 답했다. 그건 영화 속 인물만이 아니라 배우 장혁 스스로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는 사랑도 신뢰에서 시작하는 거라고 강조했다. 설렘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엔 서로의 노력과 배려가 필요한 거라며. 지난해 아들까지 먼저 얻은 후 뒤늦게 결혼식을 올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의 결혼 스토리가 궁금했다.
"2004년에 군대 갈 때가 아마 4∼5년 정도 만났던 때였나 봐요. 차마 기다리라는 말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땐 저 하나만 잡고 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기다리라고는 못하겠는데, 기다린다면 우리 결혼하자. 그게 다예요. 물론 의리로 결혼한 거 아니에요. 당연히 느낌이 있었고, 후회 없는 제 선택이자 책임이었고요."
"20대에도 저 늘 진지했고 노력도 했어요. 그런데 20대가 정확하게 표현은 하지만 인위적으로 깎아낸 듯한 느낌이라면 30대엔 뭔가 모서리가 몽글몽글해진 것 같아요. 20대엔 10개가 있으면 다 표현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할까. 요즘엔 서넛만 여유있게 표현하려고 하는 거죠. 그럼 그 이상을 주변에서 더 해주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 비하면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밸런스를 잘 잡는 배우이고 싶어요."
영화 개봉을 앞둔 장혁은 현재 KBS 드라마 '추노'를 한창 촬영 중이다. 지체 높은 양반이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쫓다보니 어느새 첫손에 꼽히는 노비 추격자, 추노꾼이 된 인물이 그의 몫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힘든 촬영을 하고 있지만, 장혁은 그것이 늘 꿈꾸던 캐릭터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대부'의 테마가 어울리는 남자요. 자기에게 소중한 걸 지키려 했을 뿐인데 더 외톨이가 된 남자, 하지만 그걸 견뎌야 하는 남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여명의 눈동자'예요. 전 그게 리메이크 된다면 몇백, 몇천 대 일 오디션을 보고서라도 최대치 역을 하고 싶어요."
그가 첫 드라마 '모델'로 데뷔한 지 벌써 12년. 장혁은 그간 하얀 머리의 댄스 가수로, 순정파 남편이자 아버지로, 30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배우로 변화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론 다른 게 없다"고 했다. 잘 안 변하는 게 장점이라고도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장혁은 십수년 째 같은 소속사에 몸담고 일하고 있다.
"인생은 비슷해도 조금씩 변해요. 시각도 달라지고 변화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지죠. 취향이나 느낌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게 현장에서 느끼는 생생함, 그 에너지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내가 왕년엔 말이야∼'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요. 그 때를 생생하게 가져가고 싶어요."
장혁이 손바닥을 한 번 만져보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굳은살이 손바닥 가득히 배겨 있었다. 양 손을 마주 문지르며 장혁은 흐뭇해했다. "일은 이렇게 해야 된다"며. 그 손바닥이 늘 같은 모습으로 노력하는 장혁을 조용히 말해주는 것 같아 그가 손을 치울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봤다.
"무술도 하고, 운동도 하고, 승마도 하고…. 열심히 하면 굳은살이 생기고 멍이 들고 땀이 차죠. 그 땀을 씻을 때의 개운함이 좋아요. 작품이 끝나면 이 굳은살도 가시겠죠. 괜찮아요. 다음 작품 때 다시 굳은살이 생기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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