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옥의 "짐승들" vs 모두 다의 "짐승남"

[김관명칼럼]

김관명 기자  |  2010.01.21 15:22
배종옥(왼쪽), 택연
'말'(言)이란 건 알코올 같은 모양이다. 현재의 내포된 이미지가 언제 휘발될지 모르니까.

요즘 유행하는 '짐승남'. 가요나 드라마, 영화를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남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까지 떠오른 키워드가 바로 '짐승남'이다. 방송 5회만에 시청률 30%를 넘긴 KBS 인기사극 '추노'의 주인공 장혁과 오지호는 '짐승남'으로 추앙을 받고 있고, 남성 아이돌 그룹 2PM 역시 '짐승돌'이라는 이름으로 여동생, 누나, 이모팬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하여간 요즘 남성에 대해 갖다 붙일 수 있는 최고의 형용사는 '짐승남'이라는 거.

그러나 사실, 용어 정리가 제대로 안돼서 그렇지 이 '짐승'이라는 말은 '나쁜 남자', '수컷', '야생', '날 것' 등과 거의 혼용돼서 쓰이는 것 같다. 거칠게 말하면, 지난 2001년 김규완 작가의 '피아노'에서 주인공 조재현이 처음 퍼뜨린 '나쁜 남자'의 몽환적 아우라가 꼭 10년만에 대중문화 전반을 강력히 감염, 정복, 굴복시킨 셈이다. 현재의 여리고 예쁘장하고 귀엽기만 한, 심지어 눈화장까지 한 남성들에 대한 조롱 아니면 무시, 그것도 아니면 점잖은 타이름일까.

하지만 좀 더 파고들면 이 '짐승'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남성한테 할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욕에 가까운 호칭이었다. 뭐랄까, 세심한 도덕이나 남에 대한 배려 없이 본능에만 충실한 육식동물 같고, 게걸스럽고, 흉악하고, 온 몸엔 남한테 상처만 안길 뻣뻣한 털만이 그득할 것 같은 그런 무엇. 구태여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짐승'에 대한 외연은, 점잖은 유교사회를 지향했던 그리고 그 잔재의 교육에서 똑부러지게 자유롭지 못했던 대한민국에서는,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에 가까웠다.

대표적인 게 지난 2007년 SBS를 통해 방송됐던 김수현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다.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이 드라마는 김희애가 몰락시킨 두 평온한 부부 김상중-배종옥의 이야기다. 김희애가 김상중을 꼬셔 바람을 피웠다. 문제는 김상중의 아내가 김희애의 여자친구라는 것. 꼭지가 돌아버린 배종옥한테 김희애가 천연덕스럽게 그런다. "내가 한 불륜은 사랑이야", "네가 뭔데 웬 간섭이니?"

악에 바친 우리의 배종옥이 어렵게, 제 속의 온갖 분노를 담아 힘들게 폭발시킨 대사는 이랬다. 김희애가 천연덕스럽게 "네 남편이 뜨거웠다"라고 우아 떨며 말한 직후다.

"이 짐승들!!"

결국, 2007년만 해도 '짐승'이라는 말이 가진 아우라는 이랬다는 거다. 온갖 저주를 담아 퍼부을 수 있는 그 지고지악한 욕, 선량한 우리들이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흉내 내서도 안될 그 혐오스러운 형태가 바로 '짐승'이었다. 배종옥의 말에 맞받아친 우리의 김희애 대사 역시 "행복한 짐승이지!"라고 했던 걸 보면, 더욱 그렇다. 배종옥의 언니인 하유미는 이 "행복한 짐승"이라는 말에, 예의 그 성격 그대로 "이 나쁜 기집애"라고 발끈했으니까.

그러나 불과 3년 후인 2010년, '내 남자의 여자'와도 같은 상황에서 과연 분노의 종합선물세트를 날리는 한 여자가 "이 짐승들"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짐승남' 택연이 여성 연예인 스타들의 이상형으로 쏜꼽히고, 남성 아이돌 그룹 이름이 아예 '비스트'이며, 유행하는 스타들의 화보 촬영 컨셉트가 '짐승남'인 이 마당에. 설마 다른 우리에 갇힌, 내 영역엔 아직 침범하지 못한 짐승이라서 아직 여유로운 걸까. 우리 영역엔 '초식남'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어서?

아무 때나 '짐승남' 쓰지 말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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