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희극인 배삼룡씨가 황망히 가셨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고인을 잘 모른다. '비실이'라고 불리는 건 왜인지, 왜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까지 칭송되는지, 빈소에서 그리 슬피 우신 구봉서씨와는 어떤 관계였는지..무엇보다 고인은 과거 어떻게 대중들을 웃겼는지.
삶은 결국 디테일이다. 말의 상찬, 개념어의 허망한 난무 속에 공감은 점점 멀어져간다. 고인의 발인이 끝나고 유해가 묻힌 지금, 몇 가지 '디테일'을 통해 고인을 기리고 추억해본다. 첫 번째는 1973년 12월 대낮에 벌어진 그 유명한 '배삼룡 납치극'. 당시 고인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전적으로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아마 1973년 12월4일인가, 7일일 겁니다. TBC와 MBC가 배삼룡씨를 차 안에 두고 서로 대치했던 것은. 각목까지 들고, 대낮에 그런 일도 아마 다시는 없을 거에요."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MBC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와요'를 연출했던 유수열 현 로고스필름 대표의 회고다. 69년 8월 첫 방송한 '웃으면 복이와요'는 70년대 초반 당대 최고 인기의 코미디 프로그램이었고, 이 핵심 멤버가 바로 고 배삼룡씨와 구봉서씨, 고 서영춘씨였다. 그리고 '웃으면 복이와요'의 초대 연출자 고(故) 김경태 PD가 TBC에 전격 스카웃된 후 사령탑을 맡은 이가 바로 유수열 대표다.
유 대표가 '웃으면 복이와요' 연출을 맡은 전후 상황은 이랬다. 이어지는 유 대표의 회고.
"TBC도 '좋았군 좋았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잘 안 됐다. 워낙 '웃으면 복이와요'의 인기가 높았으니까. 그러다 TBC가 전격적으로 김경태 PD와 김일태씨 등 '웃으면 복이와요' 작가들을 스카웃 해갔다. 저는 김경태 PD 밑에서 '웃으면 복이와요' 조연출을 한 뒤 '유쾌한 청백전'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사태가 이렇게 돼서 '웃으면 복이와요' 바통을 이어받게 됐다."
작가까지 사라진 '웃으면 복이와요' 팀에 더 안좋은 소식이 돌았다. '웃으면 복이와요'의 핵심 멤버인 배삼룡씨가 TBC '좋았군 좋았어'에 출연할 것이며 녹화일까지 정했다는 것이다. 유 대표는 "당시 이병철 회장이 '어떻게 하든 배삼룡을 데리고 오라'는 특명을 내렸고, 이미 배삼룡씨 품에는 그쪽에서 전달받은 백지수표가 있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런 위기감(?)에 유 대표는 3, 4명으로 '배삼룡 사수 특별팀'을 구성했다. 목포MBC 사장, MBC 전무를 지낸 민창환씨도 이 특별팀의 한 멤버였다. D데이는 '좋았군 좋았어' 녹화일인 73년 12월4일로 정해졌다. 당시 배삼룡씨가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었던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명랑 스테이지' 녹화일이 마침 그날이어서, '명랑 스테이지' 녹화가 끝난 다음 그리로 갈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명랑 스테이지'는 을지로4가 수도예식장을 빌려서 녹음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배삼룡씨를 그의 뷰익 승용차에 태우고 수도예식장으로 같이 갔다. 거기 갔다가 TBC로 직행할 확률이 높으니까 우리가 싣고 간 것이다. 녹음이 이뤄지고 있을 때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다. 그때였다. 우리 쪽으로 건장한 체격의 청년 20여명이 다가왔다. TBC 사람들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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