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좁은 아이돌 가수들이 브라운관을 넘어 스크린을 엿본다. 2000년대 들어 물밀듯 이어지고 있는 가수 출신 스타들의 스크린 진출은 아이돌이 가요와 방송을 장악하다시피 한 2010년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가수 출신 연기자들의 스크린 도전사는 '굴욕사(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상적인 실패의 연속이었다. 2000년 재앙에 가까운 결과로 끝난 H.O.T의 '평화의 시대' 이후 아이돌의 스크린 진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2010년의 극장가에서는 조금 다른 조짐이 읽힌다.
아이돌의 스크린 진출이 최근에야 대세가 된 것 같지만, 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해 200편 가까운 영화가 만들어지던 한국영화의 중흥기 1960년대 중후반엔 인기 가수를 영화에 출연시키는 게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톱 배우 못잖은 화려할 활약을 펼쳤다.
당대의 톱스타 남진은 자신의 히트곡 제목과 똑같은 영화 '가슴 아프게'(1967), '울려고 내가 왔나'(1967)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주목할만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그에 힘입어 남진은 수십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꽃미남 남자 가수만이 아니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자신의 가수 반생을 다룬 영화 '엘레지의 여왕'(1967)에 출연하기도 했다.
흑백영화 시절 이야기라고? 흥행을 담보하지는 못했지만 1980년대에도 이같은 사례는 이어졌다. 조용필은 '그 사랑 한이 되어'(1980)에, 남진과 쌍벽을 이뤘던 스타 나훈아는 영화 '3일밤 3일낮'(198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982) 등에 출연했다. '담다디'를 히트시켰던 가수 이상은도 영화 '담다디'(1989), '굿모닝! 대통령'(1989)에 출연한 전력이 있다.
'돌아이' 시리즈의 전영록은 이 시기 빼놓을 수 없는 스타다. 댄스가수로 젊은 여성팬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그는 1976년부터 20여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을 활약했다. 1987년대 3편까지 제작된 '돌아이' 시리즈의 주연을 맡으며 전성기를 누리기도했다.
그럼에도 아이돌 스타의 본격적인 스크린 진출은 젝스키스의 '세븐틴'(1998), H.O.T의 '평화의 시대'(2000)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96넌 데뷔한 남성 5인조 그룹 H.O.T가 연예매니지먼트사의 철저한 기획 아래 결성되고 데뷔해 활동하는 현대적 아이돌 스타 시초로 받아들여지는 탓이다. 6인조 젝스키스는 H.O.T와 당시 쌍벽을 이뤘던 인기 그룹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스크린 진출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10대 취향 청춘물로 기획된 '세븐틴'이 20만 넘는 관객을 모으며 체면치레를 했을 뿐, 100만 가까운 팬클럽 규모를 자랑하던 H.O.T의 인기에 기댄 3D SF물 '평화의 시대'는 수십억(으로 알려진)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1만 관객 동원에 그쳤다.
이후 가수 출신 연기자에게는, 특히 연기에 데뷔하는 톱가수에게는 '드라마는 몰라도 영화는 안된다'는 끈덕진 꼬리표가 붙었다. 단순한 편견에서 근거한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최근 10년간의 경험이 이를 뒷받침했다.
신화, 클릭비, 핑클, NRG 등 다수의 아이돌 가수가 카메오로 등장한 '긴급조치 19호'(2002)의 실패를 굳이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신화 김동완의 '돌려차기'(2004), god 출신 윤계상의 스크린 데뷔작 '발레 교습소'(2004), 젝스키스 은지원의 단독 주연작 '여고생 시집가기'(2004)는 극장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브라운관에서 나름의 활약을 했던 신화의 에릭 역시 스크린 데뷔작 '6월의 일기'(2005)로 흥행 고배를 마셨다.
아이돌의 스크린 진출 잔혹사 혹은 굴욕사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신화 이민우와 하하가 호흡을 맞춘 '원탁의 천사'(2006), 뒤늦게 개봉한 쥬얼리 박정아의 '날나리 종부전'(2008) 등이 그 계보를 잇는다. 인기 가수의 출연이라는 홍보에도 불구하고 제작비를 회수하는 데 실패했다.
이어진 굴욕사를 반전시킬 가능성이 엿보이는 사례도 나타났다. 아이돌가수 슈퍼주니어 13인방이 모두 출연한 '꽃미남 연쇄테러사건'(2007), 가수에 이어 드라마로도 성공을 거뒀던 비의 스크린 진출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를 들 수 있다.
'꽃연테'는 아이돌 영화의 새로운 흥헹 모델로 꼽힌다. 이들의 출연료를 단 1억원에 묶은 '꽃연테'는 총제작비 15억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돼 10만 남짓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으나 해외 판권 수익과 DVD 판매로 수익을 보전하며 '돈을 번 영화'가 됐다. 슈퍼주니어의 팬이기도 한 10대 타깃을 철저하게 공략한 게 주효했다. 100만 팬클럽 H.O.T의 '평화의 시대' 1만과 비교하면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톱 가수에 이어 드라마 '풀하우스'(2004)로 히트 드라마의 주인공에 등극한 비는 첫 영화에서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박찬욱 감독,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영화 '각설탕'의 히로인 임수정과 의기투합했다. 영화는 7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실패했지만 감독의 독특한 취향이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비 역시 가능성을 지닌 영화배우로 평가받았다. 이는 비가 할리우드에 진출, '스피드 레이서'(2008), '닌자어쌔신'(2009)로 활약하는 디딤돌이 됐다.
이들의 영향일까. 최근 아이돌 가수들의 스크린 진출은 전과 뚜렷이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확실한 타깃을 겨냥한 10대 취향의 저예산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거나, 충무로에서 제작된 대중 상업영화의 조연을 통해 스크린에 연착륙하는 것이다.
동방신기 영웅재중의 '천국의 우편배달부'의 경우 단막극과 영화의 중간 형태로 실험적인 도전을 했다. 큰 반향은 없었지만 소규모 제작비, 해외 및 TV와 연계한 개봉 전략으로 흥행 리스크를 대폭 낮출 수 있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후자다. 20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한 '내사랑 내곁에'(2009)의 가인이 대표적 예다. 김명민, 하지원이 주연을, 박진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에서 브라운아이드걸스의 가인은 무대에서의 짙은 화장을 완전히 지운 채 조연으로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원더걸스의 소희도 마찬가지다. 이미숙, 김민희 등과 함께한 '뜨거운 것이 좋아'(2008)의 조연으로 안정적인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다. 화제가 됐던 김범과의 키스신은 귀엽게만 보엿던 국민 걸그룹 막내가 품고 있던 연기자로서의 욕심과 가능성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대해 한 영화투자사 관계자는 "제작자도 영화에 도전하는 배우들 스스로도 관객들이 얼마나 냉정한지를 잘 인지하고 있다"며 "인지도 만으로 무모하게 영화에 도전했다 실패하는 숱한 사례들이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돌 가수가 출연한 한 영화의 홍보 관계자는 역시 "아이돌이 기존의 인기에 기대서 '팬들이 움직여주겠지' 식의 막연한 기대는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개봉을 앞둔 영화에서도 이같은 경향이 뚜렷하다. 빅뱅의 탑은 한국전쟁을 다룬 대작 영화 '포화속으로'에서 학도병 주인공으로 분해 관객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티아라의 멤버 지연은 공포영화 '고사 두 번째 이야기:교생실습'에서 주연을 맡았다. 둘 모두 첫 영화고 첫 주연이지만 이들의 부담감은 첫 스크린 무대에서 작품에 대한 평가와 흥행에 대한 부담을 홀로 짊어져야 했던 아이돌 선배들과는 확연히 처지가 다르다. 탑은 차승원, 권상우, 김승우 등 무게감있는 선배 배우들의 든든한 뒷받침 속에 주연으로 섰다. 지연 역시 다수 드라마에 출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편의 인기를 업은 장르영화에 출연하는데다, 함께 출연한 김수로 황정음 윤시윤 등의 지원을 안고 갈 수 있다.
한 제작 관계자는 "예전에는 톱가수들이 주연이 아니면 영화를 안 하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엔 완전히 달라졌다"며 "작품이나 이미지를 고려한 무리하지 않은 도전, 똑똑한 도전이 대세다. 인기가수 출연이 능사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다른 홍보 관계자 역시 "가수로서의 인기보다는 연기력과 캐릭터 소화력이 관건"이라며 "오히려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작품에 올인하는 것이 배우로서 본인의 미래에도, 작품에도 더욱 득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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