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을 지켜보던 거장은 먼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상을 독식한 승자는 머쓱했다. 환호하던 청중들도 점점 웅성이기 시작했다.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제 49회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이 열렸다. 문자 그대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싹쓸이였다. '광해'는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기술상 전 부문 등 무려 14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병헌의 인기상까지 더하면 모두 15개 트로피. 가장 많은 부문에 후보에 올라 그 전부를 챙겼다. 한국영화 시상식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결과다.
매끈한 만듦새와 흡인력 있는 이야기, 배우들의 열연 속에 무려 1100만 관객을 모은 '광해'의 수상. 상을 받기에 부족함 없는 작품이었고 축하받아 마땅한 결과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올해 쇄신을 다짐하며 심사 결과를 당일까지 은행 금고에 보관하는 이벤트까지 벌인 대종상은 이래저래 쑥스럽게 됐다.
'광해'의 독식은 바뀐 심사 방법의 영향이 크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시상식인 대종상은 해묵은 공정성 시비와 논란에 시달려 왔다. 급기야 올해는 평가 방식을 바꿨다. 각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들을 비교하는 대신 영화별로 점수를 매기고 이를 기준으로 최고점 작품에게 상을 줬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를 점수로 매겨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도 각 부문별로 하나하나. 대종상이 도입했다는 영화의 절대 평가라는 방법 자체에 대한 의문이 큰 데다가, 명확하지 않은 후보 선정 기준 자체도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올해 대종상은 시상식 당일 오전까지 기술부문의 후보를 발표도 하지 않았다. 시상식에서도 기술상 각 부문 후보는 호명조차 하지 않고 넘어갔다. 다만 '광해', '광해' 그리고 또 '광해'가 있었을 뿐이다.
환호는 뒤로 갈수록 조금씩 잦아들었다. 청중도, 영화인들도, TV로 생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시상자로 무대에 오른 원로 영화감독 김기덕 심사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시상식 도중 심사 방법을 설명했을 정도다. 김 감독은 "심사위원장인 저 자신도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상을 받은 사람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광해'를 제작한 리얼라이즈픽쳐스의 원동연 대표는 "저희도 상을 이렇게 많이 받을 줄 몰랐다"고 소감을 밝혔을 정도다.
동명의 원로 감독이 시상한 심사위원 특별상을 끝내 직접 받지 않은 김기덕 감독의 모습은 시상식 분위기를 대변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제 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피에타'의 김기덕 감독은 특별상 수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뜬 것은 이날 시상식 결과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여우조연상, 신인여우상, 신인남우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며 강세를 예고했던 '피에타'는 심사위원 특별상과 조민수의 여우주연상 2개 부문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한 관계자는 "'피에타'가 단순히 상을 많이 타지 못해서가 아니라 한 영화에만 이상하게 집중되는 시상식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게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사실 시상식에서 한 영화가 독식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뛰어난 영화가 시상식을 통해 발굴되고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며 이런 의미의 독식도 의미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를 보고 점수를 매겨 합산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통해 선정된 상이라면 상의 의미도 무게도 퇴색되기 마련이다.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을 평가하고 결산하는 영화 시상식이라면 더더욱.
기꺼이 대종상의 진심을 인정해주기에 올해 시상식은 기준마저 의아하다. 평가방법이 다가 아니다. 올해 대종상은 6년 전 영화 '플라이 대디'를 연출한 '해로'의 최종태 감독에게 신인상을 수여하는가 하면, 무려 4명의 배우가 주연상, 조연상, 신인상 등애 중복해 이름을 올리는 기이한 후보 선정으로 빈축을 샀다.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조연상, 신인상 후보에 올랐으나 모두 불발된 조정석은 신현준으로부터 눈빛이 장동건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속 자신이 맡은 납뜩이의 유행어 '어떡하지'라고 응수했다. 그 말을 대종상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대종상,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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