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프를 만든 이후 취미가 음악이 되었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일이 참 번거로웠다.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올리고 곡이 끝나면 또 닦아서 올려야 되고, 레코드 앞에 꼭 지키고 있어야 음악을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렇게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릴테이프(reel tape) 같은 녹음기나 카세트 테이프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역시 번거롭기는 마찬가지다. 음악을 듣는 즐거움에 그 같은 일도 즐거움으로 했다. 그러다가 1978년에 KBS FM클래식 방송이 시작되어 그 후로는 KBS 방송을 많이 들었다. 음질도 뛰어나고 프로그램도 좋아 항상 켜 놓고 들었다.
FM 방송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하고 싶다. KBS 93.1 FM 방송이 수도권에 잘 안 잡히는 곳이 있다. 심지어는 서울 시내에도 수신이 잘 안 잡히는 지역이 있다. 나오기는 해도 음이 흐려지고 잡음이 많이 섞여 나온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심하다. 전파는 햇빛의 일조권과 같아서 전파 수신도 일조권과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다. 만일 어느 지역의 주민이 방송 전파를 수신하는데 피해를 받는다면 정부 또는 관계기관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특정 전파나 업무용과 달리 방송 전파 수신은 국민(주민)이 마땅히 가질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관계 기관은 중계소를 세워서라도 주민들의 전파 권리를 해결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부터 나는 사업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배운 기술로 사업을 펼칠 마땅한 아이디어도 없는 것 같았다. 얼마간을 고민 하다가 TV대리점을 하기로 계획하고 장소를 물색한 뒤 곧바로 준비하고 대한전선 대리점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자서 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직원을 3명 채용했다. 그리고 차 2대를 구입했다. 차 두 대에 TV, 냉장고, 선풍기 가득 싣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당시 대한전선 디-제로 TV가 한창 인기가 있었다. 1만~3만원을 계약금으로 한 월부판매로 많이 팔았다. 그리고 냉장고며 선풍기, 다리미 등 하여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매출이 참 많았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나갔다. 내가 느슨하게 한 탓일까 위기가 닥쳐왔다. 사고 카드가 말할 수 없이 불어났던 것이다. 그 때는 신용사회의 기반이 취약한 때라 구매자가 마음만 가지면 언제든지 자취를 감춰 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사 와서 주민등록을 하지 않고 살아도 큰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사를 가 버리면 찾기가 참 어려웠다. 영업을 하는 동안 중간중간 사라진 사람이 있었지만, 그래도 물건이 잘 나가고 운영은 되기에 영업은 계속했다. 급기야 나는 도망간 사람들을 수배하는 직원까지 두면서 찾았지만 크게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간 영업이익은 자꾸만 악화되어가고 의욕이 전과 같지 않아 3년 만에 사업을 접고 말았다.
이 일 이후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사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사람들이 경험을 했다고 하는 말들을 자주하는데, 그제서야 그 말이 많은 사람들을 겪어 보았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3년을 돌아보고 여러 가지 교훈을 얻었다. 그 해 겨울엔 나의 마음이 매우 평화로웠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시간들이 다시 찾아왔다.
/이광수 메타뮤직사운드 대표
<저작권자 © ‘리얼타임 연예스포츠 속보,스타의 모든 것’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