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대 최고의 앙상블 캐스트 영화는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 1974)이었다. 스티브 맥퀸, 폴 뉴먼, 윌리엄 홀덴, 페이 다너웨이, 프레드 아스테어가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한 사소한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초고층 건물 완공 기념 파티가 열리고 건설사에 여러 모로 도움을 준 상원의원(로버트 분 분)도 초청되어 온다. 사장(윌리엄 홀덴 분)이 파티장의 한 쪽으로 상원의원을 조용히 모시고 가서 1929년 빈티지 로마네 꽁티 한 박스를 보여 준다. 사장은 직원에게 "오늘 드시게 의원님 테이블에 한 병 놓고 나머지는 댁으로 보내드려" 하고 지시한다. 의원은 깜짝 놀라며 이런 걸 어디서 구했냐고 묻는다(1929년 로마네 꽁티는 1324병만 생산되었다). 사장은 별 거 아니라고 답한다. 의원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브루스 윌리스의 '레드'(Red, 2010)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데이비드 더윌리스('해리 포터'의 루핀 교수)를 고문해야 하는 데 그 고문 방법이 특이하다. 더윌리스는 명품 와인 수집가, 투자자인데 캐서린 지타-존스가 그 와인을 한 병씩 꺼내서 라벨을 읽어 준 다음 병을 깨버린다. 1940년대 산 와인 두 병을 보냈는데도 더윌리스는 말 안하고 버틴다. 결국 메리-루이즈 파커가 미인계로 자백을 받아낸다.
HBO의 명작 미니 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 2001) 에피소드 10에는 전쟁의 막바지에 미군 공정대가 베르히테스가덴에 있는 히틀러의 별장 '독수리 둥지'(Eagle’s Nest)를 접수하고 괴링의 집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윈터스 소령이 친구 주당 닉슨 대위를 괴링의 와인 셀라로 안내 한다. 1만 병의 샴페인과 와인이 저장되어 있다. 다 가져도 좋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닉슨은 그 중에서 딱 한 병을 가지고 나온다.
와인은 영화에서 이렇게 의미있는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아예 와인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다.
1973년산 캘리포니아의 화이트 와인 샤토 몬텔레나의 탄생 과정을 그린 '와인 미라클'(Bottle Shock, 2008)은 "포도밭에 가장 좋은 비료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야"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라고 불리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누른 사건을 기초로 했다. 크리스 파인이 테이스팅 이벤트가 프랑스가 미국을 능멸할 의도로 기획되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몰래 와인 몇 병을 출품하는 아들로 나온다.
'이어 오브 더 코멧'(Year of the Comet, 1992)에서는 캐릭터들이 나폴레옹 황제의 봉인이 붙은 1811년산 와인을 두고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까지 유럽 전역을 누비며 쟁탈전을 벌인다. 결국 영화에서 500만 달러짜리인 주인공 와인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픈된다.
대 혜성(Flaugergues)이 관측되었던 그 해는 유럽산 와인의 최고 빈티지로 통한다. 2011년에는 Château d’Yquem의 1811년 빈티지 화이트 와인(보르도) 한 병이 7만5000파운드에 팔려 기네스 북에 오르기도 했다. 한 와인 수집가가 인도네시아 발리에 레스토랑을 열고 전시해 두기 위해 매입했다. 로버트 파커는 1996년에 이 와인을 테이스팅 해 보고 만점인 100점을 주었다.
(역사 상 가장 고가 와인은 샤토 마고 1787이다. 거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의미가 없는데 소장자는 50만 달러로 본다. 토마스 제퍼슨이 원래 주인이었다. 포시즌 호텔의 한 불쌍한 웨이터가 병을 쓰러뜨려 깨트렸는데 보험금이 22만 5천 달러 나왔다.)
'구름 속의 산책'(A Walk in the Clouds, 1995)에서는 키아누 리브스가 나파 밸리의 큰 와이너리 집 딸의 딱한 사정 때문에 하루만 남편 역할을 해 주기로 했다가 결국에는 그 집 식구가 된다. 화재로 잿더미가 된 와이너리를 되살린다. 나파와 소노마, 세인트 헬레나의 와이너리를 돌면서 촬영했다. 와인 페스티발 장면은 파사데나 시청에서 찍은 것이다. 두루 호평을 받은 작품이고 모리스 자레의 음악도 좋다.
폴 지아마티의 흥행 성공작 '사이드웨이'(Sideways, 2004)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와인산업에 직접 영향을 미친 영화다. 주인공이 영화에서 내내 피노 누아를 칭찬하고 메를로를 폄하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서 피노 누아 판매가 16% 증가하고 메를로는 2% 하락했다고 한다. 지아마티가 친구한테 "나는 빌어먹을 메를로는 안마셔!" 하고 소리를 지르는 단 한 장면 때문에 미국시장 점유율 14%였던 메를로가 추락했다(Sideways Effect). 그러나 소노마 주립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이 영화 덕분에 와인 소비는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 러셀 크로우와 마리옹 꼬띠아르의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 2006)은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와이너리에서 낭만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고르드를 포함한 프로방스에서 찍었다. 런던의 유능한 채권딜러인 크로우는 뜻하지 않게 프로방스의 와이너리를 상속받게 되어서 빨리 팔아치울 생각으로 남프랑스로 향한다. 거기서 꼬띠아르와 사랑에 빠진 크로우는 런던에서의 창창한 미래(money)를 포기하고 프로방스(life)로 돌아온다.
나는 이탈리아 팬이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살 때 가 본 나파와 소노마 외에는 직접 가 본 와인 산지가 몬탈치노와 몬테풀치아노 두 곳 밖에 없기 때문에 이탈리아 와인에 관심이 많다. 이태리 레스토랑에 가면 아는 척하면서 일단 토스카나 와인을 찾는다. 몬탈치노와 몬테풀치아노에 갔던 얘기를 자랑으로 꺼내기 위한 얄팍한 수법이다.
우리 말에 "사람의 정신은 글로 읽고 마음은 술로 읽는다"가 있듯이(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이탈리아에는 "In Vino Veritas"(와인 안에 진리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래와 함께 와인을 많이 좋아하고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세계 최대의 와인 생산국, 수출국이다.
이탈리아 와인을 소재로 한 영화들 중 가장 수작은 '산타 비토리아의 비밀'(The Secret of Santa Vittoria, 1969)이다. 로버트 크라이튼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골든 글로브 상을 받았다. 와인 소재 영화 중 최고로 꼽힌다. 2차 대전 중 하디 크뤼거가 지휘하는 독일군이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산타 비토리아를 점령하고 마을에서 난 모든 와인을 탈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장 안소니 퀸과 마을 사람들은 독일군에게 와인 수천병을 내놓고는 나머지 백만병을 옛 로마의 동굴에 숨긴다.
'바롤로 보이즈'(Barolo Boys, 2014)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제노아와 토리노 사이 서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바롤로 와인을 기술 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레드 와인 브랜드로 성장시킨 젊은 와인사업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다. 바롤로는 브루넬로, 아마로네와 함께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으로 통한다.
영화제와 와인축제를 같이 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 2011년에 시작된 미국 나파밸리 영화제에서는 와인에 대한 신작 영화가 선보이기도 한다. 전 세계에 229명밖에 없는 마스터 소믈리에가 되는 과정을 담은 'SOMM'(2013)은 2012년에 동 영화제에서 시사회를 가졌던 작품이다. 물론 이 영화제에 와인 영화만 출품되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는 '스턱'(Stuck, 2017)이 작품상을 받았다.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에서 열리는 와인영화 페스티발은 와인에 대한 작품만 출품되고 슬로베니아에서 열리는 그로스만 영화-와인축제는 판타지 장르가 초점이다. 플로리다의 비로비치에도 영화-와인 축제가 있고 나파의 서쪽 이웃 소노마도 비슷한 행사를 연다. 소노마 국제영화제는 역사가 20년이 되었는데 브루스 윌리스가 평생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토스카나, 피에몬테와 함께 이탈리아 3대 와인 생산지인 베네토에도 와인 축제가 있다. 영화제를 같이 하는지는 모르겠다. 조니 뎁과 안젤리나 졸리의 '투어리스트'(The Tourist, 2010)가 보여주는 베네치아 약간 북쪽 코넬리아노와 발도비아데네에서는 해마다 5월에 '비노 인 빌라'(Vino in Villa)라는 이름의 샴페인-와인 페스티발이 열린다. 이 때가 되면 900년 역사를 지닌 산살바토레 성이 문을 열고 61개의 와이너리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과점하던 세계의 와인산업은 처음에는 미국, 이제는 중국까지 가세한 글로벌 산업이 되었다. '몬도비노'(Mondovino, 2004)는 캘리포니아 나파와 이탈리아 피렌체, 프랑스 보르도를 커버하는 글로벌 와인전쟁 이야기 다큐다. 본인이 소믈리에인 조나단 노씨터가 만들었다. 전 세계 22 곳의 와이너리를 방문해서 촬영했다.
러셀 크로우가 나레이션을 한 다큐 '와인을 향한 열정'(Red Obsession, 2013)은 와인 다큐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 86%다. 보르도의 와이너리들을 찍은 영상도 매우 아름답다. 미술품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와인 시장과 투자에서 중국이 큰 손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중국은 특히 보르도 와인의 세계 최대 수입국이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와인제조자들이 '프랑스 수준으로는 세련되지 못한' 큰 고객들과 어떻게 씨름하는지를 보여준다.
'풀바디 가족 이야기 영화'라고 불리는 프랑스 영화 '포도밭의 후계자'(You Will Be My Son, 2011)는 아들의 실력에 만족하지 못해 집사의 아들에게 와이너리를 물려주려는 와인제조자의 와인에 대한 열정과 집착을 보여준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 89%의 수작이다. 와인을 소재로 한 이런 영화들을 보면 명품의 완전성을 지향하는 궁극의 프로 정신이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경건하고 성실한 애착 같은 것이 잘 느껴진다. 우리가 뭘 하면서 살든지 꼭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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