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에 있었던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 사회자는 작년에도 사회를 했던 지미 킴멜이었다. 작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해프닝이 벌어진 시상식이었는데 올해 시상식은 부분적으로 작년 시상식의 시퀄이다. '라라랜드' 때문이다.
작년 시상식에서는 반세기 전인 1967년 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에서 보니와 클라이드였던 페이 다너웨이와 워렌 비티가 시상자로 나와 '라라랜드'(La La Land, 2016)가 작품상을 수상했다고 발표했다. '라라랜드' 팀 모두가 단상에 올라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기뻐했다. 그러자 단상이 약간 어수선해지면서 놀랄 일이 일어났다.
수상자인 '라라랜드' 제작자가 트로피를 든 채 마이크에 대고 "수상작은 '문라이트'다. 농담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봉투 안의 카드를 높이 흔들어 카메라에 보였다. 과연 거기에는 '문라이트'(Moonlight, 2016)가 수상자로 적혀 있었다. 이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스타들을 포함한 관객이 여러 가지 표정으로 놀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떨떨한 '문라이트' 팀이 단상으로 올라와 수상소감을 말하는 순서가 뒤따랐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워렌 비티는 애초에 엉뚱한 봉투를 받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여우주연상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라고 적혀있었는데 비티는 이게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서 발표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너웨이가 '라라랜드'가 눈에 들어왔던지 '라라랜드'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이 봉투는 회계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가 준비한다. 그런데 담당자가 엠마 스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데 정신이 팔려 실수를 했던 것이다. 올해 시상식에 다시 사회자로 나온 킴멜은 작년 얘기를 하면서 원래 회계사에 대한 농담을 하려고 했는데 자기가 하지 않으니까 회계사가 해버렸다고 하면서 올해는 수상자로 호명이 되더라도 바로 일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겸연쩍게 되었다. '라라랜드' 팀은 말할 것도 없고 '문라이트' 팀도 뭔가 2% 부족하게 되었다. 꼭 남의 상을 뺏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사회자인 지미 킴멜은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했으나 킴멜이 잘못한 것은 없다. 스티븐 콜베어가 나중에 꼬집었다. 흑인 팀에 상을 주기 싫으니 백인 팀이 먼저 만져라도 본 다음 넘기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고.
다행히 개인이 수상하는 카테고리가 아니었기에 충격이 덜했을 뿐이다. 러셀 크로우가 남우주연상으로 발표되어서 기쁨에 넘친 수상소감을 이야기 했는데 갑자기 덴젤 워싱턴이 진짜 수상자라고 정정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문라이트'는 물론 수상 자격이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라라랜드'가 수상했어도 아무런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킴멜이 혼란한 와중에 그러면 둘 다 상을 주자고 즉흥 농담을 했다.
사실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은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가장 의외였던 것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아름답고 각성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작품상을 받은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 중론이다. 6~7000명에 이르는 회원들 중에서 젊은 층과 소수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잠재적 이유로 꼽힌다.
'라라랜드'는 14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1997년 작 '타이타닉'(Titanic)과 타이 기록이다. 작품상은 이상하게 '반납'했지만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포함해서 6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최연소 감독상을 받은 데이미언 셔젤은 '위플래쉬'(Whiplash, 2014)에 이어 할리우드의 무서운 신예로 자리 잡았다. 셔젤은 이 영화를 위해 주옥같은 음악을 작곡하고 음악상과 주제가('City of Stars')상을 받은 저스틴 허위츠와 하버드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다. '라라랜드'는 두 사람이 오랜 세월 같이 준비한 작품이다.
'라라랜드'가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위플래쉬'의 성공 때문이다. 재즈 뮤지컬은 할리우드에서는 멸종된 장르로 여겨졌다. 그래서 셔젤은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간신히 찾아낸 투자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고칠 것을 요구했고(주인공을 재즈 피아니스트가 아닌 록 뮤지션으로 바꾸라는 등) 그래서 접었다고 한다. 셔젤이 무명인 것도 이유였다.
반면에 '위플래쉬'는 훨씬 단순하고 투자를 유치하기 쉬운 작품이다. '위플래쉬'가 작품상을 포함해서 아카데미상 5개 부문에서 후보에 오른 후 '라라랜드'는 시나리오가 완성된 지 5년 만에 투자자를 찾을 수 있었다.
'라라랜드'는 LA를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마다 무수히 많은 청춘들이 레스토랑 종업원에서 시작해서 대스타가 되는 꿈을 안고 LA와 할리우드로 모여든다. 여주인공역 엠마 스톤도 배우가 되기 위해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LA로 옮겨 온 경우다. 대개 초반에는 고생들을 많이 한다. 스톤도 무수히 많은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라라랜드'는 그런 LA를 무대로 한 성공담이다. 흔히 인종차별과 범죄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LA와 할리우드에 대한 보기 드문 장밋빛 묘사이기도 하다. LA에서는 영화의 각 장면을 찍은 장소를 따라 도는 '라라랜드' 투어도 유행이다.
'라라랜드'는 세월이 흐르면서 때가 되어 서서히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으려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할리우드의 역사를 수놓은 주옥같은 고전 뮤지컬들이나 재즈음악이 그런 것들이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댄스 씬은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를 연상시킨다. 탭 댄스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특히 이제는 소멸되어 가는 흑인 음악인 재즈를 백인 주인공인 라이언 고슬링이 되살렸다는 점이 돋보인다. 킴멜은 작년 시상식 서두에서 2016년은 백인이 재즈를 가르치고 흑인이 NASA를 살린 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2016)는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경쟁 시대에 흑인 여성 수학자가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 NASA에서 활약하는 이야기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미국 역사에서 흔히 간과되는 중요한 순간을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도 92%다.
킴멜은 올해 시상식에서 '원더우먼'(Wonder Woman, 2017)과 '블랙 팬서'(Black Panther, 2018)의 흥행 성공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사람들이 여성이나 흑인이 주인공인 슈퍼히어로 영화가 돈이 안 된다고 이야기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이야기가 돌던 때가 작년 5월이기 때문이라고 해서 폭소를 자아냈다.
미국의 인종주의 문제를 가장 잘 그린 영화는 2006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영화인 '크래쉬'(Crash, 2004)다. 가장 유망하던 후보작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을 눌렀다(이안 감독은 감독상을 받았다). LA의 인종문제와 사회문제를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여준다. 이 영화의 출연진은 할리우드에서 안 나온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의 앙상블 캐스트다.
작년에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시켰던 미국의 인종주의 논란은 북핵 문제로 소강 상태인 듯하다.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들도 신나치는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트럼프가 신나치조차 수용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이다.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과 대기업 경영자들이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다. 미국이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라라랜드'로 남을 수 있을지 더 지켜보아야겠다.
워렌 비티의 부인 아네트 베닝은 지미 킴멜 쇼에 나와서 시상식에서 문제가 된 두 개의 봉투가 다 자기 집에 보관되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워렌 비티와 페이 다너웨이는 올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와 다시 작품상 수상작(세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 2017)을 발표함으로써 작년의 혼란을 나름 깔끔하게 정리했다.
* 이 글은 작년 10월 2일자 머니투데이 칼럼을 업데이트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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