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우상향 발전 속도는 새 세대를 맞이하며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는 중이다. '한때 유행'이라는 걱정스러운 미래 가치로 불렸었던 한류 산업, 뭔가 세련미가 부족한 느낌의 '한국적인'이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랑스러운 K-컬처로 자리잡는 데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여곡절도 많았고 말도 안되는 시행착오도 셀수 없었다. 그리고 K팝 산업은 이러한 혼란 속 발전을 드라마틱하게 일궈낸 K-컬처의 대표 히트상품이었고 선봉장이었다.
스타뉴스는 창간 20주년을 맞아 지금의 K-컬처라는 수식어를 있게 한 출발점이나 다름없는 K팝과 아이돌의 20년 전의 모습과 분위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스타뉴스가 창간을 맞이했던,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4년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이어 등장했던 양대산맥 H.O.T.와 젝스키스의 강점기를 지나 다음 세대로 넘어가기 위한 숨고르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점이었고 산업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던 H.O.T.라는 결과물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며 넥스트를 호시탐탐 노리던 제작자들의 고심이 끝나가고 있던 무렵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IMF 사태의 나비효과로 연결됐던 엔터테인먼트 체제로의 전환, 일본과 미국 진출을 통해 깨닫고 확인한 세계 음악 시장에서의 경쟁력, 그리고 싸이와 방탄소년단으로 다시금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했던 SNS와 팬덤의 막강한 영향력, 여기에 지역색과 세계관이 결합된 서브컬처화, 그리고 레트로 유행을 얹은 장르적 진화 등등. 이후 20년 동안 K팝이 발전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은 정말 무궁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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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기획에서 OO엔터로━
그리고 2004년에 H.O.T.와 젝스키스는 정점에 있지 않았다. 당시로선 존재하지도 않았던 표준계약서를 놓고 멤버들 사이에서 펼쳐진 다음 행보에 대한 동상이몽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발주자였던 신화와 배우 기반 회사였던 싸이더스에서 발굴한 god가 이들이 떠난 무주공산을 차지하면서 국민그룹으로 거듭났었다. 걸그룹 양대산맥이었던 S.E.S.와 대성기획의 핑클 역시 전성기에서 한 계단 내려온 이후 멤버들의 홀로서기 이야기가 나오던 시점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가요계는 이른바 댄스 그룹 풍년이었다. 룰라 R.ef 솔리드 DJ DOC 클론 등으로 파생된 2~4인조 그룹에 김건모 신승훈도 댄스곡으로 최절정기였다. 이는 H.O.T. 젝스키스가 아닌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가 가져온 문화적 효과의 연장선상이었다. 이른바 '아이돌 시스템'이 없었던 당시에는 팀 구성부터 주먹구구식에 가까웠다. 좋게 말해 재야의 고수 섭외였고 지인 추천 등등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으며 당연히 오디션이랄 것도 없었다.
멤버 구성 이후 데뷔 준비까지 하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20년 전에는 소속사의 수익 구조도 지금과 전혀 달랐다. 일단 음반 유통사가 앨범 제작비를 내려줬다는 게 가장 큰 포인트였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이른바 자체 제작비 없이 투자 개념으로 받은 제작비로 충당했었다. 그러다 1998년 IMF가 대한민국을 강타하자 가요계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앨범 발매(를 위한 제작 투자)에도 싸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다.
일생일대의 기로나 다름이 없었다. 투자 자금이 들어올 길이 막힌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방법은 없지 않았다. 자체 제작 시스템. 앨범 제작도 소속사가 직접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제작자들은 승부를 보는 겁니다. 우리 표현으로 내가 돈 만들어서 트레이닝 비용, 의상비 등도 예전에는 레코드사에서 받아서 충당했는데 이젠 내가 직접 이걸 대는 거죠. 돈을 (금융권에서) 빌리든 어디서 구해오든 하는 겁니다."(제작자 A)
사실 말이 쉽지 돈을 어디서 구해오나.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가수의 품을 최대한 줄이는 것. 팀이 아닌 솔로 가수 론칭으로 방향을 틀거나 댄스가 아닌 장르로의 전환도 방법이 됐다. 2000년대 초반에 대박을 터뜨렸던 대표적인 가수가 바로 비 이효리 보아 등이었고, 1999년 플라이투더스카이가 있었고 2001년 브라운아이즈가 있었고 2004년 SG워너비가 이 시점에 차례로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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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하우스 #레코드사 #슈킹━
싸이더스에서 1999년 데뷔했던 god도 결국 회사를 나오게 되는데 사실상 박진영과의 새 출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 전담 프로듀서인 박진영이 1집과 2집을 만들고 나서 JYP를 세워서 god를 전속 가수로 데려오게 된다.(박진영의 서브 작곡가로 활동했던 방시혁도 외부 용역 계약 신분으로 계약을 맺고 프로듀싱을 담당하며 이 시기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박진영이 론칭한 가수 중에는 박지윤과 노을, 별, 그리고 비였다. 양현석이 이끈 YG 역시 본인의 솔로 앨범에 더해 원타임이 나왔고 IMF 이후에는 엠보트라는 회사와 업무 제휴 또는 MOU 형태로 계약을 맺고 휘성 거미 렉시 빅마마 등을 론칭한다. 역시나 비슷한 기조였다. 대성기획의 경우 핑클 론칭 이후 클릭비가 가수 활동 이외에 멤버들이 예능으로 풀렸던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IMF는 대한민국에 기획사의 '인하우스' 시스템을 구축하게 한 나비효과였을 지도 모르겠다. IMF 한파로 인한 레코드사의 줄폐업과 제작 투자 무산은 가수들을 키우는 제작자들로 하여금 '제작도 직접 내 손으로 해야겠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불러온 결과를 맞이한 셈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공신력 있는 차트가 전무했던 1990년대 전후 시점에서 요즘 가장 핫한 인기 가수와 히트곡을 알수 있는 방법은 '길보드'밖에 없었고, 주먹구구식 입소문에 보이지 않게 자행된 방송계 입김 등이 엉뚱하게도 핫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근거 중 하나인 시대였다.
"왜 옛날 가수들은 왜 몰랐을까요? 모를 수밖에 없는 게 이 레코드사가 기획사에게 정산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기획사 사장도 모릅니다. 레코드사가 (앨범을) 몇 개월치를 찍었는지 거기에 물어봐줘야지만 아는 거죠. 그때 가수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다 길거리에서 바로 가수가 됐었고, '우리 사장이 100만장 팔았지만 정산은 이만큼 해줬다'라고 말할 뿐 (전후사정은) 모르는 겁니다. 차트도 집계가 안되니 길보드가 나올 수밖에 없고요. 앨범 마스터링도 레코드사에 다 받았을 테고요. 그런데 이 구조를 모르는 1990년대 초중반 가수들은 '우리 사장이 (앨범 수익을) 떼어 먹었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사실상 번 게 별로 없었던 그때 사장들은 소속 가수를 데리고 행사 뛰게 하거나 밤무대로 돈을 벌었어요."(제작자 B)
-[2004 아이돌과 2024 아이돌②]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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