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전설' 배우 고(故) 신성일이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났다.
4일 오늘은 신성일이 사망한지 6주기다. 신성일은 지난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30분 전남 화순의 한 병원에서 폐암 투병 끝에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고 신성일은 지난 2017년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지만 활기찬 모습을 보이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폐암 판정을 받은 그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참석, 레드카펫과 한국영화회고전에 참석하며 팬들과 만났다.
그러나 신성일은 이후 병세가 악화됐고 아무런 공식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고 신성일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한 최고의 스타였다. 신성일은 무려 507편의 영화 주연을 맡았으며 1960~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고 신성일은 1957년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고 그때 신상옥 감독에게서 '뉴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신성일이란 예명을 받았다. 신성일 본명은 강신영이다.
고 신성일은 1966년 한 해 동안 무려 89편의 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바쁜 활동을 펼쳤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낸 고인은 영화 제작, 감독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 등은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다.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 등은 제작자로 참여했다.
고인은 배우로서의 이력을 넘어 정계에도 진출을 꿈꿨다. 그는 강신성일로 개명한 뒤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가 17대 총선에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했다.
고인은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영화계의 여러 일에 앞장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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