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최진실(38)만큼 극적인 반전을 이룬 배우가 있을까 싶다. 한때 인터넷을 끄고 지냈다고 할 만큼 안티팬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그녀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가 암으로 숨을 거둔 맹순이 역을 맡은 KBS2 '장밋빛인생' 한 편으로 기사회생했다.
'2005 KBS 연기대상'은 그러한 그녀의 부활을 알리는 자리에 다름 아니었다.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쥔 것 뿐만 아니라 네티즌 투표 40%가 반영되는 베스트커플상에 이어, 100% 네티즌 투표로 이루어지는 네티즌상을 받았다.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꼽히는 비(정지훈)와 함께.
"KBS 홈페이지에 회원가입하고 한 표씩 찍어주시는 건데 그렇게들 해주셨다는 데 눈물이 났고, 이제는 받아주시는구나 싶어서 또 눈물이 났다"는 최진실을 지난 2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31일 밤과 1일 새벽으로 이어진 흥분의 시간을 보낸 후 처음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가진 최진실은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사람답게 넉넉함과 차분함을 보였다. 그러나 배우답게, 연기에 대한 진한 욕심만은 감추지 않았다.
- 수상의 기쁨이 남달랐을 것 같다. 그날 수상 후 한 일은?
▶'장밋빛인생'의 김종창 PD, 상대역 손현주씨와 인근 호프집에서 호프 한 잔씩 했다. 집에 들어와 아침에 깨고 나니, 아이들이 엄마가 타온 상패로 칼싸움하고 있더라.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생일을 맞고, 송년회며 시상식이 이어져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연말연시에 나도 모르게 흥분이 돼서 붕 떠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내 페이스를 찾고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 맹순이 역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작품을 보는 안목이 대단한 것 같다. 김종창 PD는 처음에 최진실씨에게 이 역을 맡기는 것을 망설였다고 했고, 개런티에 상관하지 않고 출연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들었다.
▶'장밋빛인생' 시놉시스를 받아봤는데 웬만한 대본보다 캐릭터가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돼 있었다. 꼭 맹순이 역을 해야겠다 싶었다. 내가 개런티를 논할 입장도 아니지 않는가.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 같다. 사람을 막상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생각했던 것과 만들어진 이미지와 다른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지 않은가. 김종창 PD와 첫 미팅을 가졌는데, 그 만들어진 이미지를 깨버리면 맹순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봐주셨다. ('장밋빛인생'을 집필한) 문영남 작가가 마지막까지 내게 맡길 것을 고수해주셨다고 한다.
- 그런 선입견에 의해 힘든 일이 많았다고 보나.
▶정말 진실이 있는데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생기면서 그 힘이 막강해지는 것 같고 다수의 힘이 거짓을 진실로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사람에 대한 부분은 조심해야할 것 같다. 황우석 박사의 경우도 너무 씁쓸하다. 우상화도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도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 '장밋빛인생' 이후 백혈병 환자들과 다녀온 히말라야 등반도 큰 화제가 됐다. 평소 등산을 즐겼는지.
▶히말라야 다녀와서 주변인들과 등산을 하면서 건전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전에도 산에는 자주 올랐다. 물론 청계산과 히말라야는 그 격차가 너무 크지만.
3~4년 동안 공백기 있을 때 청계산을 종종 올랐다. 산에 오르면서 생각도 많이 하고 오고가는 사람들과 덕담도 주고 받고 그랬다. 환희(큰 아들) 임신했을 때도 산을 올랐다. 지금은 환희와 함께 오르는데, 환희도 산을 잘 오른다.
산을 오르면서 인생과 삶을 생각하게 됐다. 지쳐서 중간에 내려가고 싶을 때도 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주변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국 본인 스스로가 올라가야 되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 오랜 기간 동안 스타로서 사랑받다가 그 사랑을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됐다.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있을 듯 하다. 앞으로 연기 외에 다른 일을 할 계획은 있는지.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며) 스타로서 많은 분들께 사랑받았지만 사랑받는데 대가는 있고, 그 부분에 대한 책임은 져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한 때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연기가 아니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게 없더라.
'장밋빛인생'을 촬영하면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이게 정말 내 자리구나 싶었다. 내 스스로 정말 행복했을 때는 연기를 할 때다. 내가 겪었던 일들은 당연히 감수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데뷔후 20년 가깝게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이유를 스스로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연기자로서 갖추고 있는 것이 특별할 게 없다. 요즘 후배들 보면 무얼 먹어서 그리 발육이 좋은지 같은 여자가 봐도 저렇게 몸매가 예쁠까 싶다. 내가 그런 조건을 갖추었다면 더 잘 할 수 있는 것 같은데…(웃음) 연기대상 시상식에 가서도 너무 부러워서 드레스 입은 후배들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외형적인 조건으로 보면 내가 섹시한 것도 아니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고 아무런 것도 없다. 발성도 기초적인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도 안다.
그냥 발가벗고 나서서 한작품 한작품하면서 연기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고, 또 어떤 역을 맡으면 무섭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피할 수 없다면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심지가 굳은 것,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도태되지 않았을 듯 싶다. 남들 보다 가진 게 적은 만큼 부족한 부분 채우기 위해 대본을 100번씩 보곤했다.
- 후속작은 정했나.
▶후속작 선정에 예전보다 더 많이 신중해졌다. 맹순이 역으로 생각지도 못한 큰 사랑을 받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천천히 선택하겠다.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다.
-MBC의 전속계약이 남아있다.
▶MBC에서 당연히 프러포즈해주시리라 생각한다. 내부적으로는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외주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들도 많으니 (MBC에 출연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라고 본다.
-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장밋빛인생'이후 슬픈 코드의 작품 섭외가 많이 들어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밝은 역을 해보고 싶다. 스릴러 같은 장르를 해보고 싶다. 연기자로서의 욕심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진실이 아닌, 좋은 시나리오를 통해 지금까지의 나와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다. 결혼하기 직전인 2000년 '단적비연수'에 출연한 이후 영화는 안했는데, 더 나이 먹기 전에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다.
기존에 활동하셨던 분도 좋겠지만 실험적인 젊은 감독이 특별한 최진실을 발견해줄 수 있었으면 한다. 상상도 못할 최진실의 이미지를 활용해줬으면 하는 욕심도 있다.
- 컴백작을 고를 때까지 계획은.
▶1월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을 다녀올 생각이다. 아이들하고 뒹굴뒹굴하면서 보내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환희는 나를 닮아 그림을 잘그리고 글씨를 잘 쓴다. 연기자로서의 끼는 모르겠다. 노래 같은 것을 시키면 많이 수줍어 하곤 한다.
- 재혼에 대한 생각은 없나. 아이들이 참 예쁘던데 연기자를 시키고 싶은 생각은.
▶그런 생각은 없다. 일 때문에도 그렇고, 아이들이 커서 엄마가 짐이 된다고 그럴 때 생각해보겠다. 사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없는 빈 자리를 채워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다. 그래도 애들을 여유있게 대하고 싶은데, 아이들이 엄마가 일하러 가서 자리를 비우면 많이 섭섭해 한다.
환희는 이제 너무 커서 안아주지를 못한다. (아들 얘기를 하면서 최진실의 눈은 기쁨으로 빛났다.) 현재는 아이들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하는 것보다 아이들 키우는 것도 힘에 부친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이들의 미래를 두고 상상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뭘 해도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할 셈이다.
- 신년 소망이 있다면.
▶지난해 많은 사랑 받게돼 네티즌들께 고맙다. 받아주지 않으면 못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내 드라마를 봐주셨다. 2005년만 같았으면 좋겠다.
며칠전에도 환희와 영화 '킹콩'을 보고 함께 순대국도 먹으러 갔었다. 우리 애들이 키가 크다. 환희도 5살인데 벌써 6, 7세용 옷을 입는다. 2, 3년만 있으면 내 키 정도 될 듯 싶다. 그때 환희와 팔짱끼고 데이트하고 싶다.
내 나이가 이제 살아온 만큼만 살아가면 될 나이더라.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 잘 챙기며 살고 싶다. 마지막으로 살림과 아이들을 돌봐주는 엄마와 이모에게 고맙다는 말 하고 싶다.
<사진=박성기 기자 music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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