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정신에 깃들어있을까, 육체에 깃들어있을까. 애정과 증오는 상대어일 뿐일까, 동의어가 될 수는 없을까.
8일 개봉하는 이안 감독의 '색, 계'(色, 戒)는 사랑에 대한 정신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농염하게, 더러는 서글프게 그려낸 작품이다.
40년대 '마도'라고 불릴 만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안 감독은 불교 용어인 '색'(色)과 '계'(戒)를 화두로 남녀, 특히 여인의 입장에서 사랑을 풀어냈다.
국공 내전이 한창이던 38년 중국, 전쟁을 피해 홍콩으로 탈출한 왕치아즈(탕웨이)는 그 곳에서 한 무리의 동료들을 만난다. 이 열혈청춘들은 연극을 통해 홍콩 시민들의 항전 의식을 고양시키고,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앞잡이 역을 하는 정보부 부장 이(양조위)를 암살시키는 계획을 짠다.
왕치아즈는 동료들과 함께 수입 사업을 하는 브르조아의 부인으로 변신, 이에게 접근한다. 이는 왕치아즈에게 호감을 갖지만 갑작스럽게 헤어진 뒤 이들은 3년 후 상하이에서 재회한다.
왕치아즈는 더욱 위세가 막강해진 이를 제거하는 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알려졌다시피 '색, 계'는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005년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안 감독에게 황금사자상을 선사했기에 2007년 또 다시 수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은 결과였다. 물론 현재 국내와 마찬가지로 베니스에서도 적나라한 베드신은 화제가 됐다.
무삭제로 공개되는 '색, 계'의 베드신은 국내에서는 생소할 정도로 높은 수위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베드신은 수많은 말과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들을 농축해 왕치아즈와 이의 관계를 표현했다. 2시간 30분을 넘기는 러닝타임에서 모두 세 차례 등장하는 베드신은 허리띠를 하나씩 조이듯 힘을 실어줘 영화에 긴장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색, 계'는 인생의 주인공을 꿈꾸는 여인이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을 따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왕치아즈는 또래와의 어울림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됐으며, 그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처녀를 잃는다. 친구들과 뿔뿔히 흩어진 뒤 숙모에게 맡겨져 눈치밥을 먹으며 대학생활을 한다. 아버지는 영국에서 재혼하면서 인연이 멀어지고 바로 그 때 예전 동료와 재회하게 된다.
왕치아즈에게 이를 죽이는 음모는 행복했던 지난날의 재현이며, 그녀가 공연했던 연극처럼 스산한 삶을 단숨에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기회가 됐다. 그녀가 없는 돈을 모아 극장을 찾는 것은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색, 계'가 4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도 가슴에 와닿는 보편타당한 이야기인 것은 이 덕분이다. 이안 감독은 '색, 계'에서 이데올로기를 두 남녀의 만남과 이를 또 가로막는 장치로만 설정했다.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여인과 두려움 속에서 시작되는 사랑.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과 '센스 앤 센서빌리티' 등 전작에서 직유와 은유로 표현한 이야기를 여전한 화법으로 이번 작품에서도 그려냈다.
최근 내한한 이안 감독은 거사를 앞두고 왕치아즈가 다른 선택을 한 것을 "육체가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사랑이 몸과 정신에 나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로스는 말 그대로 육체를 통한 사랑이다. 이안 감독은 에로스를 그리기 위해 어쩌면 농도 깊은 베드신을 작품에 담았는지 모른다. 18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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