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이 너무 얄미웠던 적이 있다. '연애의 목적'에서 눈 깜짝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우리 한번 하죠'를 외친다. '18금 대사'도 유분수가 있지. 남자의 치부를 들켜버린 마음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 '극락도 살인사건' 등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채 언제나 한 걸음 비켜있는 캐릭터가 그의 모습이었다. 천진난만한 순진한 눈빛에는 연쇄 살인범, 순수한 사랑 등 다양한 박해일이 있었다.
박해일은 "'연애의 목적' 유림 때문인지 제가 적역이었다고 하던데요"라며 캐스팅의 이유를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비슷한 모습의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다.
'모던보이'의 이해명은 전 작품들의 캐릭터를 집대성한 인물이다. 능청스러운 성격은 '연애의 목적' 유림을, 순도 깊은 사랑은 '소년, 천국에 가다'의 배네모를, 시대에 맞서는 용기는 '괴물'의 남일을 닮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든 작품들의 박해일은 '철이 없다'의 다른 면을 보여줬을지 모른다. 때론 순수하게 때론 발칙하게 비춰지는 모습들처럼 말이다. '모던보이'의 난실은 피터팬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꿰매준 웬디 같은 존재다.
'모던보이' 이해명은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으로 당시 1%에 속하는 상류층이었다. 우연히 비밀을 간직한 여인 조난실(김혜수)을 만나면서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모던보이'를 통해 좀 더 자유로워진 피터팬을 연기한다. '경성'이란 스펙터클하게 펼쳐진 화려한 도시, 그 곳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란 꿈을 좇는 그의 모습이 영화 '모던보이'의 힘이다.
-시사회를 마치고 나니 기분이 어떤가?
▶ 기자들과 시사회를 본 게 처음이다. 기자들도 처음에 영화를 볼 때 흥분감이 생기지 않나. 극장에서 장면들을 볼 때마다 그 때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해명의 상대는 정난실이 아니라 경성이라 생각한다. 이해명이 가지고 있던 시대적 한계는 경성의 화려한 불빛과 대립되는 것 아닌가?
▶정지우 감독님도 비슷한 설명을 해줬다. 경성이 주인공인 것 같아 그 경성 안에서 신나게 뛰어놀자,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이해명 캐릭터를 구성하는 데 경성과 난실의 비중을 어떻게 두었나?
▶사실 난실을 쫓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만큼 해명은 난실에게 자신을 건다. 난실을 쫓다보니 역사를 마주치게 되는 것 같다.
-해명은 '연애의 목적'의 유림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이 박해일이 적역이라고 했던 이유도 '연애의 목적'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성격이 비슷하기보다는 고정적이지 않고 유연한 인물이다.
-과거에는 한번 보여줬던 캐릭터를 다시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부담이 되지 않았나?
▶그것은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모던보이'에서는 과거에 연기했던 부분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지우 감독님은 설명이 많은 분이다. 사실 배우에게 정확한 연기를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아 이래서 그랬구나'라고 생각을 많이 했다. 우회적으로 말하면 비유의 도덕을 가졌다고 할까. 배우에게 열어주는 감독님이다.
-그런 면에서 캐릭터나 대사 등이 수정된 부분이 많을 것 같다.
▶별로 그렇지 않다. 대사 등을 이야기한 것은 극장 분장실에서 해명과 난실이 이야기하는 장면 정도다.
-그렇다면 정지우 감독의 연기지도가 가장 잘 살아난 장면은 무엇인가?
▶영화에 해명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감독님은 "그냥 어색하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고 "해명은 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외칠 때 난생 처음 외쳐보는 그런 느낌인 거야"라며 자세히 설명했다. 영화에서 잘 살아난 것 같다.
-정지우 감독은 디테일함을 잘 살려내는 감독이다. '해피엔드'나 '사랑니'에서 인물들의 감성을 쫓는 시선이 특별했다.
▶'모던보이'는 정지우 감독님의 그런 화법을 좀 더 확장한 작품인 것 같다. 과거에는 현미경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보았다면 이번에는 경성이란 큰 무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수줍음이 많은 것 같은데 작업하기 어렵지 않았나?
▶(웃음) 정지우 감독님은 가까이서 보면 눈이 호랑이다. 현장에서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봐야하는데.
-김혜수와 함께 연기를 하게 돼 '쾌재'를 불렀다고 했다.
▶김혜수씨가 난실 캐릭터에 '딱'이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현장에서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사실 배우들끼리 '파이팅'을 하더라도 서로 친해지기 어렵다 하지만 관계에 있어서 너무나 편하게 지냈다. 그것은 배우 김혜수가 가지고 있는 쿨한 기운 때문이다. 이래서 프로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영화에는 댄스를 추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연습은 많이 했나?
▶일주일 정도 연습했다. 해명은 임기응변이 뛰어난 유연한 캐릭터다. 그런 그가 추는 장면이기 때문에 좀 어색해도 괜찮았다(웃음).
-박해일이란 배우는 큰 실패를 하지 않았다. 작품들이 모두 흥행하지 않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난 실패란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다. 결과는 100% 중요하지는 않다. 시나리오를 받고 작품을 할 때는 관객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작품이 기대 이하로 나온다면 그것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잘못이다. 과정의 실패가 더 무섭다.
-'모던보이'가 개봉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일까? 다음 작품에 대한 캐스팅 소식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질문을 한다. 1년에 한 편은 했던 것 같은데 왜 소식이 없냐고. 우선 '모던보이'가 늦어진 것은 컴퓨터 그래픽 때문이었다. 정지우 감독님은 추석 전날까지도 편집을 했다. 6개월 전 블루매트에서 찍은 장면의 편집본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본 후에 완성본을 보니 기다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던보이'도 개봉을 하니 적극적으로 다음 작품을 알아봐야겠다.
-차기작에서는 '철없는 청년'의 이미지를 벗어날 생각은 없나? '철없다'가 박해일이 가지는 캐릭터의 기본 틀이 될까 우려 된다.
▶생각해보니 모든 작품에서 '철없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정말 내가 풀어가야 할 숙제다. 차기작에서는 적극 고민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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