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더딘 소리가 있었던가. 저렇게 무딘 걸음이 있었던가. '더디고 무딘'이 결코 아름답게 느껴질 수 없는 시대에 '더디고 무딘'이 일군 역설의 쾌거를 바라보는 일은 오늘의 삶을 물끄러미 뒤돌아보게 한다. 사랑한다 하지 않아도 그것을 온전히 읽어 내리고, 미움과 원망도 평화롭게 용서되는 삶의 한 자락이 끝없이 펼쳐진다. 영화 ‘워낭소리’는 그 생경스러움의 일관으로 오늘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치욕을 아름답게 선사했다.
나는 이 영화를 영화적 장르나 형식, 그리고 평론가적 독법으로 대하고 싶지 않다. 극장으로 발걸음 했던 300만 관객과 또 집계되지 않은 관객까지 포함해 그 한 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편해서이다. 결과론적으로 이미 영화의 발로는 그러한 범위 안에 범주해 있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로서의 ‘워낭소리’는 여러 장면에서 작위적인 기법이 엿보여 실소를 금치 못한다는 평단의 칼날 같은 비평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평론가 허문영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워낭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바로 이 소시장 장면이다. 왜소한 80살 노인이 삐쩍 마른 40살 소를 데리고 와서 팔려고 한다. 사람들은 빈정대고 한 상인은 “이런 소 있으면 다른 소도 안 팔리니 빨리 데리고 가라”고 차갑게 쏘아붙인다. 이젠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노쇠한 소, 30년을 함께 산 그 소를 더 먹일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못해 시장에 끌고 온 병들고 휘어진 노인, 무지막지한 노동으로만 채워진 생의 마지막 문턱에 선 두 비루한 육체를 향한 세상의 냉소와 멸시. 우리는 노인과 소에겐 어떤 연출도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두 늙은 육체를 그 자리에 이끈 건 고단하고 힘겨운 삶 혹은 가혹한 운명밖에 있을 리 없다. 이 한없이 쓰라리고 슬픈 장면에 마침내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워낭소리’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워낭소리’는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묵묵히 담아내고 있다. 2009년 영화판의 기적을 이루어낸 ‘워낭소리’는 소와 노인의 고루한 30년 삶을 78분 안에 녹여낸 영화다. 정겨움과 탄식이 교차하고 깊숙이 숨겨둔 본향의 눈물을 잔인하게 끄집어냈다. '더디고 무딘'의 근원적 미학을 실종한 오늘의 우리를 흔들어 깨운 문제적 영화다.
영화는 시종일관 고루하다. 막장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숨 막히는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불편하지만 껴안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 땅을 일구는 노인의 무딘 손과 소의 더딘 움직임, 그리고 눈망울. 팔순 농부와 마흔 살의 소는 서로 삶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 ‘더디고 무딘’ 컷과 컷의 생경스러운 단절을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사유의 인식이라는 공간을 형성한다. 하여 그 고루함의 끝없는 진행은 관객들에게 무엇을 잊고 살고 있는가를 불편하게 혹은 통렬하게 물어온다.
노인은 수의사를 통해 소의 수명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듣는다. 30년을 동고동락한 파트너의 죽음 앞에 노인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담담함이 전하는 생경한 감동은 영화를 더욱 몰입하게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노인과 소의 이별을 고하기 직전, 소는 자신이 남아있는 힘을 다해 두 노인의 겨울나기 땔감을 마련하고서야 비로소 눈을 감는다. 끝없이 펼쳐진 장작은 관객의 가슴을 화마로 지피기에 충분하다.
때로 영화는 평범한 앵글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기도 한다. 하여, 엉뚱한 컷에서 관객들은 눈물을 짓는다. 노인과 늙은 소가 무거운 나무 짐을 나눠지고 함께 걷는 장면이다. 시선은 땅으로, 움직임의 미동은 현격하게 느리다. 지게를 멘 노인의 백발은 유난히 무겁게 보이고 굽은 등은 더없이 좁게 느껴진다. 리어카에 한 가득 나무를 싣고 끈을 등에 두른 늙은 소의 시선은 한번 씩 노인을 힐끔 향한다. 쏟아 오른 등뼈는 마치 낙타처럼 앙상해 보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카메라를 향해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어렵게 보인다.
그러나 결코 고통스럽거나 불행해 보이지 않는 그 발걸음 속에서 우리는 위태롭지 않은 그들의 일심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를 되돌아본다. 무거운 짐을 나눠진 오랜 동료는 앞서거나 뒤서지도 않으며 묵묵히 또 천천히 함께 걷는다. 시선은 땅에 머물지만, 그들은 하나라고 관객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인이 지게에 멘 나무를 소가 끄는 리어카에 실으면 그만일 것을...
세기말, 우리의 문화는 홍수처럼 넘쳐흘렀지만 눈여겨 볼 만 하고 가슴에 넣어두어야 할 정서는 손에 꼽힌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은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서 접촉되고 느껴야 할 수위는 더 심해졌다. 가치를 상실한, 어처구니없는 상업성이 밥상 위에 올라 안방은 말라비틀어진 화분속의 죽은 식물처럼 메말라 갔다. 인간의 심연을 건드리는 작품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경박하고 당혹스러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함량 미달의 화법이 얼룩졌다. 조용히 안으로 천착하고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의 이야기를 잊고 살 무렵 ‘워낭소리’가 그 두려운 껍질을 깨트렸다.
영화 ‘워낭소리’는 우리의 잠재된 고향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 그 본연의 울림이다. 그 울림은 귀가 먹어도 가슴으로 들릴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이야 말로 눈물을 생성한다. 객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 없는 그 눈물의 의미는 잊고 살았던 나와 연결된 존재에 대한 발견으로 귀착된다. 그 감동의 발견 속에 숨은 가치를 획득하는 순간 죽어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천천히, 다시 천천히 우리 곁으로 파고든 노인과 늙은 소의 ‘더디고 무딘’ 발걸음과 눈빛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경외를 묵묵히 가르친다. 경계 밖 또 다른 삶을 안으로 제시한다. ‘딸랑- 딸랑-’ 워낭소리가 멈춘다. 죽어가는 늙은 소의 코뚜레를 잘라 풀어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충실히 각자의 영역을 지켜온 가족에 대한 경외를 가슴에 담아낸다.
영화 ‘워낭소리’는 그 생경스러움의 일관으로 오늘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감동을 아름답게 선사했다.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 처럼.
<강태규 /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전문계간지 ‘쿨투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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