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이었다. 영화 '청연' 개봉을 앞두고 인터넷이 시끌벅적거렸다. 인터넷매체 오마이뉴스에 '청연'의 주인공 박경원에 대해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일었다.
'청연'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 박경원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당시 일장기를 달고 하늘을 날았던 만큼 친일행적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행된 '청연'에 대한 낙인찍기 여파는 상당했다. 해당 기사를 쓴 사람이 인용한 원문의 저자까지 나서면서 "기사는 오류"라고 지적했지만 '청연'은 이미 친일파 영화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졌다.
'청연' 사건은 한국영화계에 큰 상처를 안겼다. 영화가 영화 외적인 것으로 휘둘릴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당시 마케팅을 맡았던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말인지라 영화를 보면 진정성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하지만 큰 오판이었다. 미친 굿판이 일어나서 대응을 하긴 했지만 너무 늦었다"고 토로했다.
영화가 영화 외적인 일로 부침을 겪으면 창작자들 사이에서 내부검열이 일기 마련이다. 상업영화는 남의 돈을 끌어다 여러 사람에게 선보여 돈을 버는 만큼 내부검열을 피할 수 없기도 하다.
2005년 2월 개봉한 '그 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을 담았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제작부터 논란이 일었다. 결국 고 박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소송을 걸면서 일부 장면을 들어내야 했다. 계약까지 체결했던 대형 영화사에서 개봉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돌연 배급을 포기하는 일도 생겼다.
당시 피해를 톡톡히 받기 때문인지 제작사 명필름은 올 초 개봉해 300만명을 동원한 '부러진 화살'을 극비 프로젝트로 진행했다. 마케팅 대행으로 알려져 있지만 모든 논란에서 비켜나가는 방식을 택한 것도 '그 때 그 사람들' 학습효과가 컸다.
2008년에는 '26년'이 제작에 돌입하기 직전 돌연 투자가 취소되면서 엎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강풀 만화를 원작으로 한 '26년'은 광주민주화 운동 유족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캐스팅까지 완료돼 촬영 직전까지 갔지만 돌연 투자사에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연락이 왔다. 투자사 대표가 고위층에 불려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영화 외적인 일로 흔드는 건 좌우가 따로 없다. 2010년 개봉한 '포화 속으로'는 한국전쟁 당시 밀려오는 북한군을 막아선 학도병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선 우익영화라고 비판했고, 다른 쪽에선 북한군을 미화했다고 지적했다. 제작자 정태원 대표는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고 양쪽에서 공격 받았다. 이러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지 않나"라며 한탄했다.
공지영 작가가 자신의 트위터에 "'범죄와의 전쟁'에 TV조선이 투자했단 말에 급호감 하락"이라 적어 영화계의 반발을 샀다. 공 작가는 영화계가 반발이 거세지자 "비호감이라고 했지. 언제 보이콧을 했냐"며 발끈 했다.
36만명의 팔로워를 지닌 공지영 작가는 대표적인 파워 트위테리안이다. 말 한마디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실제 각종 트위터와 인터넷 게시판에는 "'범죄와의 전쟁' 보고 싶었는데 TV조선이 투자했다는 소리에 실망이다" "영화를 보지 않겠다" 등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공 작가에 영화 투자 시스템을 설명한 한 영화 프로듀서는 공 작가 팔로워들에 맹비난을 당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피터 파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큰 힘을 옳게 사용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다.
공자가 주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노자를 만났다. 노자가 헤어지는 길에 공자에 한마디 충고를 건넸다.
"총명하고 통찰력이 깊으면서도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데 남을 너무 지나치게 비판하기 때문이오. 말을 잘하고 박식하면서도 그 몸을 위태롭게 처신하는 사람이 있는데 남의 약점을 쉽게 폭로하기 때문이라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있는 정치의 해다. 노자의 말을 새겨 들여야 할 사람이 한 둘은 아닐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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