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경제의 젖줄이었다.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향신료, 커피, 사탕수수, 담배 등 작물을 재배했고 네덜란드는 이를 세계시장에 판매해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국고 가운데 30% 정도가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19세기 말 인도네시아에서 원유가 생산되면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왕국 석유회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는 1907년 영국 셸과 합병해 '로열 더치 셸'이라는 당대 세계 최대의 다국적 석유기업으로 발전했다.
인도네시아는 2차대전이 끝난 1945년에 독립을 약속 받았지만 실제 독립은 1949년에서야 이뤄졌다. 네덜란드가 자국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4년 여 간 펼쳐진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최근 동남아시아의 신흥 개발국으로 가파른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축구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커넥션'은 인도네시아 귀화 축구 선수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실제로 최근 인도네시아 축구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는 귀화 선수들의 영향이 컸다. 적지 않은 인도네시아 귀화 선수들은 네덜란드에서 출생했다.
원래 이들의 목표는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뛰는 것이지만 그 꿈을 이루기 어려운 경우 인도네시아로의 귀화를 선택했다. 인도네시아 귀화 선수들은 모두 인도네시아 혈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귀화 과정이 비교적 순탄했다.
지난 6일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전격 경질된 신태용(54)도 이와 같은 인도네시아 축구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5일 베트남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미쓰비시컵 동남아시아 축구 대회(이하 미쓰비스컵)에서 신 감독은 귀화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킬 수 없었다. 이 대회는 월드컵 예선과 달리 FIFA(국제축구연맹)가 인정하는 대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리그 등 유럽에서 뛰는 인도네시아 귀화 선수들을 이 대회를 위해 모두 소집하기 힘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도네시아는 미쓰비시컵 조별리그에서 1승 1무 2패로 베트남과 필리핀에 밀려 4강 진출에 실패했다.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이 대회에 대한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인도네시아 축구협회도 내심 이번 대회에서 인도네시아가 지난 2020 미쓰비시컵에서 이룩한 준우승 정도의 성적을 기대했다.
그래서 미쓰비시컵 4강 진출 실패가 신태용 감독의 경질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부진한 성적 이상으로 신 감독의 경질에 더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은 '네덜란드 커넥션'이다.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축구의 강호가 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 리그 등에서 뛰고 있는 귀화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축구협회가 수리남 혈통의 네덜란드 선수였던 파트릭 클라위베르트(49)를 신태용의 후임 감독으로 선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자 인도네시아 축구협회 회장인 '스포츠 대통령' 에릭 토히르(55)도 지난 2023년 협회 회장이 된 뒤 가장 역점을 뒀던 프로젝트도 유럽에서 뛰고 있는 인도네시아 혈통 축구 선수들의 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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