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시네클릭]격정적 일탈의 추억, '이브닝'

강유정 영화평론가 ,   |  2007.11.12 08:40


만일 당신의 여생이 얼마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아니 무엇을 회고하겠는가? 더없이 순결했던 첫사랑의 여인일까? 아니면 폭풍우처럼 한 순간 휩쓸고 지나갔던 “사고” 같던 그 남자일까?

여기 인생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엔딩을 준비하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실수”라고 부르는 한 때를 회고한다. 하지만 그 실수는 그녀의 인생 가운데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은 아름다운 그 순간을 “실수”라 부르며 정정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영화는 죽음의 고비에서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앤의 침상에서 시작된다. 이미 백발의 노인이 된 그녀, 여성이라고 부를 만한 표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그녀의 환상에 나타나는 순간들은 예사롭지 않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하얀색의 별장, 햇빛에 부서지는 투명한 유리창, 하얀색 폴로 니트셔츠를 입고 서 있는 남자들. 그녀는 오십년은 더 되어 보이는 복고풍의 건물로 향하는 자신을 회상하고 있는 중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에 등장하는 저택처럼, 그녀가 방문한 집은 화려하고 사치스럽지만 어딘가 공허하다. 밝게 빛나는 햇빛이 오히려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균열을 비추는 것같은 느낌도 이와 유사하다.

재즈가수인 앤 그랜트는 단짝 친구인 라일라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빛나는 감옥에 살고 있는 자들은 바로 라일라의 가족들, 더 없이 행복해보이지만 어딘가 진실을 숨긴 듯 불편하다.

그 불편함 가운데에는 앤의 애인인 버디가 “형”이라고 부르는 한 남자가 있다. 상대방의 옷 속까지 쏘아보듯 노골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눈빛을 지닌 남자, 해리스가 바로 그 남자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해리스는 라일라의 집안과 손색없이 어울리는 엘리트처럼 보이지만 실상 속내는 복잡하다. 그는 여름 별장인 이 곳을 관리하는 집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라일라나 버디에게 그는 “형”이라기보다 하인의 개념에 더 가깝게 여겨진다. 깍듯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형”으로 부르지만 실상 그 안에는 멸시가 숨어있는 것이다.

해리스 역시 그들에게 복잡한 속내를 지니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라일라는 해리스의 매력에 빠져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해리스는 폴 뉴먼의 젊은 시절처럼 매력적인 남자이다. 버디의 애인이자 라일라의 애인으로 온 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사고를 겪듯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탐한다.

문제는 그들의 격정이 버디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형제처럼 지냈던 친구와 어제까지만해도 애인이었던 남자를 배신했다는 자책감에 앤과 해리스는 서로를 외면한다. 채 만개해보지도 못했던 감정들이 봉인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브닝'의 줄거리는 인생의 황혼기에 되돌아보는 첫사랑, 이라는 점에서 진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진부하다기보다 너무나 흔하디 흔한 소재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독특한 점은 죽음을 앞에 둔 앤이 이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와 화해함으로써 죽음이라는 미래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찬가지로 백발 성성한 노년이 된 라일라가 앤을 찾아오는 장면도 이런 맥락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왜 하필, 격정적 섹스의 추억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는가이다.

대개 첫사랑을 다루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순결했던 그녀에 대한 회고로 이어진다. 사고와 같았던 일탈, 격정적 이탈의 순간을 추억하는 '앤'은 남성적 서사와 다른 회고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어머니의 비밀을 '딸'이 이해한다는 설정 역시 그렇다. 아름다웠지만 무서운 대가를 치뤘던 일탈의 추억은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도 상속된다.

결국, 그녀는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면함으로써 화해를 한다. 그 화해는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일탈이 반드시 언어로 해명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안간힘이 오히려 씁쓸해진다.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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