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시대, 흡혈귀가 뜨는 이유

김현록 기자  |  2008.11.25 12:57
사진 왼쪽부터 흡혈귀를 다룬 영화 '렛 미 인', '트와일라잇', '박쥐'

"'트와일라잇' 홍보 영상을 보고 '올해는 흡혈귀가 쓸겠구나' 생각했어요. 일단 영화를 잘 만들었고, 무엇보다 '불황'이잖아요."

올해 칸 필름마켓을 다녀온 한 영화 제작·배급 관계자는 최근 '트와일라잇'의 미국 흥행 돌풍을 예상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과거를 돌이켜 보더라도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늘 흡혈귀 영화에 관객이 몰리곤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불황의 시대에 흡혈귀가 뜬다. 미국발 금융 위기에서 불거진 침체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흡혈귀 영화의 강세는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으고 있는 '트와일라잇'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작가 스테파니 메이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트와일라잇'은 북미 개봉 첫 주 7000만 달러가 넘는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리며 무서운 흥행세를 과시하고 있다. 아름다운 뱀파이어와 여고생의 사랑이야기는 특히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후문이다.

국내에서도 흡혈귀를 다룬 독특한 영화 '렛 미 인'이 흥행하며 작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뱀파이어 소녀와 외로운 소년의 가슴 시린 사랑을 담은 '렛 미 인'은 영화팬의 열렬한 지지 속에 개봉 2일만에 13개 개봉관이 전국으로 확대됐고, 현재 2만 관객을 넘어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다.

흡혈귀를 다룬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는 할리우드에서도 주목하는 기대작이다. 2009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공동 투자를 유치했다. 미국 유니버셜 픽쳐스 인터내셔널 스튜디오와 포커스 픽쳐스가 공동 투자하면서 북미 배급망까지 함께 확보하게 됐다.

불황의 시대와 흡혈귀 영화의 인기는 묘하게 맞물린다. 미국 1930년대 대공황의 초입인 1931년 드라큐라 영화의 원조이자 최고로 평가받는 벨라 루고시의 '드라큐라'가 신드롬을 일으켰다. 실신한 관객을 옮기기 위해 극장에 구급차가 대기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다. 2차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1979년 '드라큐라'와 '드라큐라 도시로 가다'(Love at First Bite)가 히트했고,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 '노스페라투'를 리메이크한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영화가 함께 주목받았다. 아시아 금융 위기가 닥친 1998년에는 '블레이드' 시리즈가 탄생했다.

한 영화 제작 관계자는 "불황에 흡혈귀 신드롬이 이는 걸 단순한 우연으로만 볼 수 있겠느냐"며 "흡혈귀 자체가 잔혹하고도 탐미적인 고딕 문화의 유산"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흡혈귀 영화들은 대개 불멸의 러브스토리와 에로티시즘이 결합돼 있다"며 "세기말이 연상되는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 맹목적이고도 아름다운 드라큐라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어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영화수입사 관계자는 "경제적으로 침체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묘하게 현실 도피적인 판타지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여느 귀신이나 괴수와 달리 슬픔을 간직한 실존 인물이 흡혈귀 전설의 바탕을 이룬데다 영원불멸의 아름다움과 힘을 소유한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가 매력적인 소재"라고 설명했다.

다른 영화 마케팅 관계자는 "뱀파이어는 마르지 않는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뱀파이어 영화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제작돼 왔다. 전지현이 출연한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도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느냐"며 "같은 기획이라도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뱀파이어 영화가 더 잘 조명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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