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개봉한 '왓치맨'. 알랜 무어의 동명 그래픽노블을 '300'의 잭 스나이더 감독이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젊은 시절 한때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사방팔방 뛴 '왕년'의 왓치맨들의 음울한 현실을 파헤쳤다. 한마디로 지금은 영 대접받지 못하는 은퇴 직전 퇴물 영웅들의 고뇌와 반격.
이 작품 역시나 다른 슈퍼히어로물과 마찬가지로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들이 슈퍼히어로가 되기 위해선 뭔가를 쓰거나 입는다. 소심한 중년 직장인 댄(패트릭 윌슨)은 부엉이 모양의 가면과 복장을 해야 비로소 밤의 왕자 '나이트 아울'이 되고, 키 작은 추남 코벡스(잭키 얼 헤일리)는 검정 얼룩이 덜룩한 흰 가면을 쓰고서야 비로소 막강 파워의 '로크셰어'가 되는 식이다.
그러고 보면 역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있는 그대로 '쌩얼'을 남들에게 보이며 힘자랑한 영웅들은 거의 없었다. '배트맨'은 수없이 개선된 배트맨 슈트를 입고 배트카를 타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스파이더맨'은 어디선가 거미줄 룩에 가면까지 쓰고 나와야 이 건물 저 건물 나돌아다닐 수 있었다. '슈퍼맨'은 얼굴을 가리진 않았지만, 점 하나 찍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아내의 유혹'의 은재처럼 검은 뿔테 안경 정도는 벗어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알랜 무어의 다른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에서 브이(휴고 위빙)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광대 모양의 가면을 착용한 채로 세상을 조롱했고, '헐크'는 DNA까지 바꾸며 괴물로 변신하는 초절정의 무리수를 뒀다. 이에 비하면 몇 바퀴 제자리 돌기로 총알까지 막아낸 '원더우먼'이나, 슈퍼영웅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이거 마스크'로 일상에서 탈출했던 '반칙왕'은 퍽이나 애교 수준의 영웅이었다.
나름대로 있는 쌩얼 그대로 노출하면서 사람들 앞에 "나는 영웅이다" 외친 이는 술주정뱅이 '핸콕'(윌 스미스) 정도에 불과하다. '다크나이트'의 안티 히어로 조커(고 히스 레저)까지 허옇고 벌겋게 얼굴에 분칠을 했으니까.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의 미스터 인크레더블 역시 효과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름 눈 가면을 쓰긴 했더랬다.
슈퍼히어로들의 이같은 가면 사랑, 쌩얼 혐오증은 왜일까. 단지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기 위해? '트랜스포머'의 그것처럼, 변신이 주는 매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는 결국 영웅들의 '아이덴티티'(Identity)의 문제이고, 이 아이덴티티(특히나 잃어버린 정체성)야말로 최근 슈퍼히어로물의 암울한 세계관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더욱이 요즘 배은망덕한 대중은 슈퍼영웅들의 지난 활약상엔 전혀 고마운 줄 모르니까.
가면을 벗어야만 일상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던 무기력함('왓치맨'의 댄), 그렇게나 자신의 가면 벗기기에 혈안이 된 세상에 대한 염증('다크나이트'의 배트맨), 가면을 써야만 악을 악으로 응징할 수 있었던 이율배반('왓치맨'의 로크셰어)..할리우드가 갈수록 '가면' 쓴 영웅보다는 이들의 '가면' 벗은 일상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왓치맨'을 보자. 나라의 부름을 받고 열심히 악의 무리를 쳐부수고, 구 소련의 핵 도발을 막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건 '왓치맨은 누가 감시하나' 같은 몹쓸 피켓 시위였다. 이런 세태에 염증을 느낀 영웅들이 가면과 복장을 벗은 건 '영웅'이라는 자신의 정체성 바로 그것이었다. 로어셰크가 경찰에 붙잡혔을 때 "가면만은 제발 벗기지 말아달라"고 어울리지 않게 애원했던 것도 '가면'이야말로 '자신이 살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 이유'였던 게다.
로봇에 미성년자이기는 했지만 '아톰'처럼 슈퍼히어로들이 쌩얼로 적을 쳐부수고 칭찬받는 순진한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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