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에게서 처음으로 사람을 보았다.
일을 통해 이병헌을 만난 지 근 10여년 동안 이병헌은 스타였다. 한류스타에 잘생긴 외모, 깔끔한 매너, 할리우드와 작가영화를 오가는 행보, 스캔들까지 그는 완벽한 스타였다.
그런 이병헌에게서 사람 냄새를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해부터 이어진 잡음 때문이었다. 그는 송사 속에서도 잠수를 타지 않고 여러 행사에서 당당했다. 외적인 고통이 이어지면 도망은 아니더라도 피하기 마련일 텐데, 이병헌은 늘 정면승부였다.
'아이리스'와 '인플루언스', 악마를 보았다'까지, 이병헌은 힘들수록 일로 침잠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우는 듯 했다. '악마를 보았다'에 이병헌이 맡은 역은 어쩌면 그래서 닮았다. 악혼녀를 연쇄살인범에 잃고 똑같은 복수를 다짐하는, 그럼에도 약혼녀 가족에게 전화를 받으면 '이 일 의미없지 않아'라며 눈물을 삼키듯 이야기하는...
복수를 완성하고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 냄새 나는 배우 이병헌을 보았다.
-전부터 에너지가 어떻게 그렇게 넘칠까 싶었다. 특히 최근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가 복잡하면 일에 집중하기가 힘든 법인데 오히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데.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데 숨거나 감춘다면 끝나는 게 아니니깐.
-집중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었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캐릭터에 집중력이 상당히 필요한 역이었는데.
▶예전에 선배들이 TV를 녹화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도 연기를 마저 하고 달려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다. 사실 배우라는 게 되게 연약하고 섬세한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다. 커다란 게 공격을 하면 굉장히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이게 내가 남들보다 다른, 내가 프로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연기할 때 캐릭터에 방행되는 어떤 것도 침해받지 않으려 어느 순간부터 몸부림치고 있다.
-현실 속 이병헌도 '악마를 보았다' 속 인물처럼 울어도 웃는 것 같고, 침착한데다 피를 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목이 메여)의연하다고 할지라도 마치 오리가 물 아래서 미친 듯이 발버둥치는 것처럼 살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집중하려고 애를 썼고. 잡다한 내 몸부림이라고 할까.
잠수타지 않은 게 의외였다고 했는데. 오히려 내겐 그런 시선이 의외다. 잠수를 타는 것은 피하는 것이다. 오해나 음모에 휘말릴 때 나만 진실 되고 당당하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들고 지쳐있는 상황이지만 해야할 일이기도 하고.
-'놈놈놈'부터 '지.아이.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아이리스' '인플루언스' '악마를 보았다'까지 3년 여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악마를 보았다'를 할 때는 몸과 마음이 다 지쳐있던 시기였다. 앞서 캐스팅된 최민식보다 덜 보여지는 역이기도 하고, 소진될 수도 있었을텐데.
▶소진된다는 건 맞는 말이다. 역할 자체를 보면 최민식 선배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세밀한 감성을 안에서 느껴야 그 감정이 곁으로 드러나는데 그걸 좀처럼 확인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모니터를 봐도 작은 화면이니깐 잘 모르겠고. 긴 터널에 있었던 느낌이었다.
-영화 속 인물과 현실 속 이병헌이 어느 순간 겹쳐보이던데. 지옥 같았던 심신의 상태가 연기에 영향을 줬나.
▶그런 상황이 연기에 도움을 줬는지는 지금은 모르겠다. 사실 온전히 시나리오 안에서 연기를 해야지 다른 감정을 끄집어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김지운 감독은 괴물을 쫓다가 괴물이 되는 사람 이야기라고 했지만 영화 속에서 이병헌이 괴물이 된 것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오히려 이병헌에 감정을 이입시키려 인간적인 갈등을 겪는 인물로 그려진 것 같은데.
▶맞다. 악마가 돼 가는 것을 전혀 배제한 채 연기했다. 그렇게 하면 관객이 너무 뻔하게 느낄 것 같았다. 이 인물이 악마가 됐다고 느끼건 아니면 동조하건 그건 관객의 선택에 맡기고 싶었다.
-제한상영가 논란을 겪었는데. 개봉 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처음 시나리오 읽었을 때 굉장히 상업적인 코드가 강한 줄거리라고 생각했다. 잘하면 상업과 예술, 두 가지 이야기가 다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갈리긴 하지만 상업과 예술로 나뉘지는 않고 있는데.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게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선 반가운 일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잔인함을 무기로 삼아 보여준다기보단 드라마가 아주 강렬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가 내 여자를 죽였어, 그래서 복수했어라고 남들에게 이야기 한다면 '어 잘했어'라고 할 수 있다.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복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꼭 그래야하니'라고 말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내가 맡은 역에 관객들이 감정이 이입되면 오히려 마음의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간에 이 사람이 변해가는 모습에 이입이 안될 수도 있고, 그런 점이 논란의 지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악마성이 보이고 논란이 일수도 있고.
-어느 순간 잘생긴 배우에서 연기 잘하는 스타가 됐는데. 터닝 포인트가 있었을 것 같다.
▶터닝 포인트라고 하면 딱히 떠오르는 순간은 없다. 다만 연기는 정답이 없고 말이 살아야 좋아진다는 선배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많은 생각과 경험이 결국 연기에 도움을 주는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이 원래 클로즈업을 자주 사용하지만 이번에는 특히 많았는데.
▶오히려 나한테는 고마웠다. 최민식 선배처럼 지르는 연기는 풀 샷으로도 잘 감정이 드러나는데 내가 하는 연기는 잘 드러나지 않으니깐. 연기 내내 잘하고 있는지 답답했던 점이 그것이었고. 또 워낙 김지운 감독이 클로즈업을 잘 사용해서 익숙해진 부분도 있다.
-기자간담회에서 인터넷 악플에서도 인간의 악마성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악플 자주 보나.
▶찾아보진 않는다. 그냥 예를 들다보니 그런 게 떠올랐을 뿐이다.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 왕따 문화, 악의도 없으면서 이뤄지는 공격들. 그런 게 악마성의 또 다른 표현인 것 같았다.
-최민식이 워낙 강렬한 연기를 했기에 받아들이는 반응 연기도 만만찮았을 것 같은데.
▶둘이 함께 붙는 연기가 많지는 않았으니깐. 하이라이트 장면 때 최민식 선배가 불처럼 쏟아내면 훅 머물었다가 내뱉는 듯한 연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 때 기분이랄까.
-'아이리스'에서 함께 한 김태희와의 루머, 사람들이 묻지 않나.
▶(하하하) 처음 묻는다. 아이들이 제기하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되나. 김태희는 굉장히 깨끗한 친구인 것 같다. 여배우로 살면 기가 센 사람들이 많은 법인데 그 친구는 너무 순수하다. 그래서 그 친구가 배우로 사는 게 남들보다 피곤할 것 같다.
-쉼없이 달리다보니 많이 소진됐을 것 같다.
▶소진의 의미가 좀 다르다. 배우의 무기가 복잡무비한 감성이라면 3년 여 동안 그걸 많이 사용한 것 같다. 그래서 깨끗이 그릇을 비우고 새롭게 채워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내면의 끝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려다 보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소진된 측면이 있다. '지.아이.조2'가 시작할 때까지 채우는 시간을 가질 것 같다. 요즘 이게 사는 거구나 싶다. 그래서 사는 게 두렵고 그래서 사는 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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