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순은 욕심 없는 배우다. 아니 그의 욕심은 다른 배우들과는 좀 다르다. 성공의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은 산꼭대기라면 박희순은 깊은 계곡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더 부릴 욕심도 접고, 좋은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고개를 숙인다.
박희순은 고정된 이미지가 없는 배우다. 그는 악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그 뒤 늘 악역이었다. 단골 질문이 왜 또 악역인가였다. 그랬던 박희순은 어느 순간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선한데다 지적인 이미지 역까지 두루 소화하고 있다.
29일 개봉하는 '의뢰인'은 박희순의 중심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의뢰인'은 자기 욕심에 충실한 변호사(하정우)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남자(장혁)의 변호를 맡으면서 진실을 놓고 검사(박희순)와 대결을 벌이는 법정 영화. 독립영화 '약탈자들'로 충무로의 주목을 받은 손영성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변호사가 끌고 가는 이야기이기에 검사 역은 배우로선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박희순에게 처음 제의가 갔다가 고사한 뒤 1년여를 돌아 다시 제의가 들어갔다는 것은 그런 점을 우려해 다른 배우들이 전부 거절했단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박희순은 '의뢰인'을 택했다. 호랑이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고충도 많았다. 용의자를 구속 수사할 수밖에 없는 검사의 심정을 담은 장면들이 숭덩숭덩 잘라나갔다. 박희순은 "감수하고 한 것인데"라며 웃었다. 그래도 "영화가 잘 나왔지 않냐"라고 말했다.
-새로운 증인들이 나오는 법정신 두 군데가 삭제됐다. 최종 버전에서 15분 정도가 삭제돼 개봉 버전이 완성됐는데. 그럼에도 상당한 재미가 있지만 배우로선 아쉬울 것도 같은데.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웃음) 특히 법정 장면 잘린 게 가장 아쉽다. 검사 역은 보여줄 게 많지 않은 역이라 법정에서 모든 걸 드러내야 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이 덜컥 잘렸으니 아쉬운 게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그럴 걸 알고 시작한 게 아니었나.
▶다시 제의가 왔을 때 매니저도 영화 하는 걸 말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지 않으니깐. 그래도 시작부터 불리할 것이란 걸 알고 한 것은 최초의 본격 법정 영화라는 점에 끌렸다. 또 오기도 있었다. 잘해야 본전이다. 다들 안한다고 했으니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아쉬움도 있겠지만 하정우와 장혁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확실히 한 것 같은데.
▶하정우는 믿음과 호감이 가는 배우다. 또 내가 배울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했고. 하정우랑 장혁이 흥행을 책임질테니 나는 다른 것을 잘 해보자 했다. 그렇게 한 발자국 물러날 줄 알아야 내 노후도 좋아지지 않겠나.(웃음)
-흥행이 고픈가.
-'의뢰인'은 법정스릴러로 빼어난 재미를 갖고 있지만 애매한 부분도 있다. 변호사 이야기로 끝까지 가지 않고 검사와 대결로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다시 변호사로 돌아가니 이야기 축이 어느 순간 갈린다. 그래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은 있지만 검사 역으로선 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애정남에게 정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자꾸 왜 이러나. 불편한 진실을 밝히려 하나.(웃음)
-2시간 15분 버전에서 15분이 삭제되면서 왜 용의자를 끝가지 범인으로 몰고 가려하는지 검사의 히스토리가 상당부분 편집됐는데. 그러다보니 검사와 변호사의 충돌로 인한 시너지가 줄었고.
▶그래서 시너지가 줄은 건 아니다. 이 영화는 나와 하정우, 장혁이 각자 자기 영역이 있고 그 안에서 자기 몫을 해내야 하는 작품이었다. 법정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다고 해도 맞붙는 게 아니라 각자 해내야 하는 부분이 있고. 그렇기에 충돌로 인한 시너지가 생기는 작품은 아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다 훌륭하다. 마치 '나는 가수다' 경연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배우다'랄까. 그런 만큼 정엽처럼 누르지 않고 지르면서 연기하는 게 더 인상 깊을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유일하게 부족한 게 뻔뻔함이다.(웃음) 문어체로 연기한 것도 대본대로 한 것이다. 그래야 법정 부분이 더 살 것 같기도 하고. 손영성 감독이 하정우는 캐릭터를 이렇게 만드는데 선배님은 그대로 가실거냐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곳은 법정뿐이니 그렇게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손 감독이 그러냐고 하더니 나중에 법정에선 박 선배는 대본대로 간다면서 하정우한테 이간질 하더라.(웃음)
손 감독은 굉장히 영리한 사람이다. 어떻게 배우들을 끌어내야 하는지 아는 것 같다.
-감독에게 좀 더 뻔뻔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나. 욕심 내지 않고 상대를 위해 깔아주는 역을 스스럼없이 맡는데. 개봉을 앞둔 '가비'도 그렇고, 박시연과 찍을 '간통을 기다리는 남자'도 그렇고. 역은 그래도 더 튀려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어릴 적 연극할 때 연출을 욕심냈던 사람으로서 배우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까지 욕심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게 얼마나 잘못인줄 잘 안다. 배우의 선을 넘지 말자가 철칙이다. 욕심을 못 부리는 게 아니라 안 부리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다. 그런 영화들을 해왔고 그렇게 연기를 해왔다. 그 결과가 지금이고. 그리고 그걸 즐기는 것 같다.
-밑바닥 쓰레기 같은 악역에서 출발했지만 그 이미지가 고착되지 않았다. 연기 잘하는 배우란 인상은 있지만 고정된 이미지는 없는 독특한 위치인데.
▶추구하는 바다. 기존 이미지를 되풀이 하는 것을 경계한다. 나는 대표작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영화에서든 비슷하게 안하려고 발버둥 쳐왔다. 그러다보니 이젠 '가비'에서 왕까지 하게 됐다.(웃음) 글쎄 이제는 왕까지 했으니 섞어 쓸 수 있을 것 같다.
-박예진과 공개연애 중이다. 결혼은 언제쯤. 공식질문이다.
▶30대에는 결혼이 조급했다. 아등바등 했고.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도 했고. 그런데 40대에 들어서니 나도 좀 즐겨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공식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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