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파란색 부분은 김윤진이 최근 펴낸 책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Heroin 김윤진의 할리우드 도전기'(해냄출판사 펴냄)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펜던트를 어루만지며 잠시 상념에 젖었던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열어보았다. 조그맣게 접힌 쪽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3년 정상, 그리고 돈-1999년 11월3일 2:39am.'
지난 1999년 11월의 어느 날, 배우 김윤진은 영화 '단적비연수'를 촬영 중이었다. 꼬박 1년에 걸친 작업의 와중이었다. 그날 김윤진은 촬영을 끝낸 뒤 숙소로 돌아와 허탈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간직하고 있던 펜던트에 메모를 적어 넣었다. '3년 정상, 그리고 돈-1999년 11월3일 2:39am'이라고.
"내 목표와 열정을 조금씩 잃어갈 즈음이었어요."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에 출연하며 '그냥 경험 삼아 하는 아르바이트야'라고 생각하고 한국의 대중 앞에 나선 지 4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 '쉬리'로 굳어진 '여전사'의 이미지는 얼마나 강했던가.
마침내 김윤진은 펜던트에 메모를 새겨넣은 것처럼 3년 뒤 노출과 농도 짙은 러브신을 마다않고 열연한 영화 '밀애'로 2002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는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또 다른 목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각오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김윤진은 이제 '월드스타'란 이름에 값하고 있다.
전세계 210개국에서 방송되고 있는 미 ABC의 드라마 '로스트'로 김윤진은 당당한 한국 배우로서 그 명성을 얻었다.
스스로 프로필 파일을 만들고 화보를 구성해 미국 에이전시와 방송사,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숱하게 만나는 노력, 안면근육마비라는 극도의 중압감에 시달린 끝에 얻은 땀과 노력의 산물이다.
다음텔존 스타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윤진은 그 같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10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참 어렵게 살았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었죠. 그 때부터 장사라는 걸 알았어요. 5달러의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알게 됐죠."
경마장 시멘트 바닥에 온갖 노점들이 장사할 물건들을 펴놓을 때면 온 식구들이 그 전날 승합차 안에서 밤을 지샜다. 일정액을 내고 장사할 터를 잡지 못한 채 예약을 해놓고 나오지 못하는 다른 노점상들의 자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세 자매가 승합차 안에 쌓아둔 잡화 박스 위에서 잠을 자곤 했어요."
그런 고생 끝에 그의 부모는 작은 잡화상점을 냈고 김윤진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연기 공부를 해왔다.
"고생 많이 하셨는데 호강시켜 드리고 싶어요, 이젠. 한국과 미국을 오가시면서 부모님께서 편히, 즐기면서 사시길 바래요."
밝은 표정을 짓는 그의 미소 속에서 '월드스타'의 자리에 올라 주위를 돌아볼 줄 알게 된 여유가 한껏 전해져왔다.
'돈도 많이 벌었겠다'고 물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지난 뒤 김윤진은 희미한 미소로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하는 기분이어서 좋다." 자신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기까지 과정을 그린 책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를 펴낸 것도 이젠 "그 돈을 좋은 데 쓰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책 인세와 모든 수익금을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터뷰 기사를 재미있게 써달라"고 웃는다. "수익금을 좋은 일에 쓰려면 책이 더 많이 팔려야 하잖아요. 읽고 싶게 써주세요."(웃음)
내 눈으로 읽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중략/거기에는('로스트' 대본) 한국어 번역 대본이 들어있었다./미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전체 대사의 50%를 다른 나라 말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닌 바로 한국말이!/중략/나로 인해 한국인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말을 하고 영어 자막 처리를 했다. 대한민국 배우로서 '문화적 효도'를 한 것 같아 자랑스러웠다.
김윤진은 "할리우드와 연애를 한다"고 표현한다. 최근 펴낸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의 원래 가제도 '할리우드 연애 걸기'였다.
연애를 하듯 때론 "사랑하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가끔은 강하게 또 때론 부드럽게 상대를 대하는 것". 당당한 한국 배우로서 남길 원했다.
그런 까닭에 '로스트' 시즌 3 촬영을 끝내고 시즌 4 발진에 앞서 김윤진은 '세븐데이즈'(감독 원신연ㆍ제작 프라임엔터테인먼트) 촬영에 한창이다.
유괴당한 딸을 구해내기 위해 일주일 안에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냉철한 변호사 역을 맡았다.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설정이다.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지 못하는 절실함 같은 것? 연기를 하면서 때론 이게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촬영이 끝나면 온몸이 쑤셔온다. 엉엉 우는 장면이라도 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뭔가를 계속 남겨둬야 한다. 풀 방법이 없다. 극중 캐릭터가 실제 인물이라도 그럴 것이다.
-한국영화에 출연이 반갑다.
▶내가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게 축복이다. 제작을 못하고 있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한국 배우들이 당신처럼 해외로 진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중국 배우들이 그들의 감성과 언어로, 할리우드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드는 게 너무 부럽다. 주윤발도 10년 동안 영어를 배웠지만 결국 할리우드에서 빛을 봤다기보다는 그들의 언어로 연기한 '와호장룡'으로 미국에서 자리를 굳혔다. 한국 배우들이 해외에 얼굴을 알리고 할리우드 펀딩으로 우리 영화를 찍는 날이 빨리 올 것이다. 그들과 내가 뭉쳐서 한국영화를 찍을 날 말이다.
-할리우드가 당신을 선택한 것은 왜일까.
▶한국에서 알려진 배우라는 게 큰 장점이었다. '로스트'와 영화 '미션 임파서블3'의 J.J. 에이브럼스가 '만나보고 싶다'고 했을 때 '배역도 없는데 미팅은 왜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라면서 이민 1.5세대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연기자를 꿈꿨다며 아이디어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3일 뒤 연락이 왔다. 없던 역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한국영화 혹은 한국 배우에 대한 할리우드의 시선은 어떤가.
▶사실 아직 인지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로스트' 방영과 인기 이후 우리말로 연기하는 모델들이 등장하는 CF가 두 편이나 나왔다. '로스트'를 촬영할 때에도 '연기자가 너무 나서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우리말을 잘 못쓰면 못 찍게 했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모두 내 책임이라는 생각에서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 이제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야.'/중략/뉴욕에서 시작해 한국으로, 다시 할리우드로, 내 인생은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펜던트 안에 새로운 목표를 적어 넣었다. '할리우드 정상, 결혼, 행복'
이제 김윤진은 또 다른 목표를 세워놓았다.
-그 만하면 이제 정상의 이름으로 불려도 되지 않을까.
▶아직 멀었다. 할리우드의 경우 블록버스터보다 저예산 영화가 투자받기 더 힘들다. 거기서 그 같은 영화에 내 이름을 걸고 제작사가 영화 제작을 위한 투자를 받게 하는 게 다음 목표다. 그게 진짜 스타 아닌가.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그건 오만 혹은 자만과는 엄연히 달라 보인다. 김윤진에게는 늘 목표가 있었고 그는 목표를 향해 조심스럽지만 열정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왔기 때문이다.
한때는 결혼과 일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남자친구는 내가 배우라는 사실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하면 바깥일은 가끔씩만 하고 집안일에 충실해주기를 바랐다/중략/나는 큰 고민 없이 사랑을 버리고 일을 선택했다./내가 다시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을까?/중략/상처만 남고 사랑을 잃는 한이 있어도 사랑을 하자. 이제는 나도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
그 같은 걸음 위에 김윤진은 사랑에 관한 생각도 조심스레 펼쳐놓았다.
"많은 여배우들은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실 포기하는 부분이 많아요. 사랑과 결혼도 큰 부분이죠. 어차피 선택햐야 하는 상황. 두 가지를 다 잘 못하는 상황 같은 거죠."
그 역시 연애도 해봤고 결혼과 일을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파트너"가 더 절실한지 모른다. "일을 끝내고 나면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고 나 역시 그를 기다리는 그런 상상"을 그는 말했다.
"결혼은 가능한 빨리 하고 싶어요"라며 바람을 드러내는 김윤진에게 그 '파트너'에 대한 '기미가 없느냐'면서 '조만간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기미? 누가 없다고 했어요?"라며 웃는다. 얄궂다.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도통 헷갈릴 즈음 "1년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몰라요"라며 깊은 웃음을 건넨다.
듣는 사람 나름의 판단과 상상일지언정, 부디 김윤진으로부터 또 다른 좋은 소식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일상 속 행복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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