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또 질질 끄냐" "이제 '왕과 나' 본다" "시청자를 뭘로 아느냐" 시청률 30%를 넘기며 월화드라마 지존으로 자리잡은 MBC 사극 '이산' 얘기다. 11일 방송분 시청률은 자체 최고인 35.3%(TNS미디어코리아 기준)를 기록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게시판은 "답답하다"는 글로 달궈지고 있다.
11일 '이산'의 제42회 방송. 국본인 세손(이서진)을 제거하기 위해 또 칼을 든 정순왕후(김여진)와 홍인한(나성균) 등 조정 중신세력. 이같은 반역을 추상같이 엄히 다스리는 우리의 세손과 신이 난 우리의 홍국영(한상진)..이길 바랐지만, 이건 시청자들의 순진한 바람이었다. 정작 이날 방송에서 세손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차라리 정순왕후를 폐서인시키겠다고 한 영조(이순재)가 이날 방송의 주인공이었다. 영조도 이런 세손이 시청자 만큼이나 답답했던 걸까.
시청자들이 '이산'에 답답해 하는 이유는 크게 다섯가지다.
첫째, 자꾸 반복되는 '낚시 마무리'와 '하지만 내용 무(無)' 구조. 쉽게 말해 "불이야" 소리질러 사람 우루루 몰리게 하고는 "근데 조금 전에 꺼졌어"라고 하는 식이다. 이날 마지막 장면. 할아버지의 매병(치매)이 역사에 남을까 걱정돼 제대로 반역죄인들을 처단못한 세손, 이를 안 영조가 '아내' 정순왕후에게 불호령을 내린다. "오늘부로 중전을 폐서인시킨다." 깜짝 놀라는 정순왕후, 더 놀라는 세손. 그러면서 컷.
이 드라마를 처음 본 시청자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을 것이다. "드디어 제대로 뭔가 시작되는구나." 하지만 속는 것도 한두번. 미리보기를 보면 '폐서인' 교서는 세손에 의해 반포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계시면서 권력이 부서지는 것을 보시라"고? 세손이 기막히게 말은 잘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에 정순왕후가 폐서인됐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결국 43회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시청자들은 또한번 좌절할 것이다.
둘째, 세손에 대한 비(非)대중적 묘사. 정조가 누구인가. 그 지긋지긋한 후진적 조정세력 속에서 개혁파 리더십을 발휘한 조선 최고의 임금 중 한 명 아닌가. 하지만 드라마는 이같은 정조에 대한 대중적 인기와 기대를 매번 저버리고 있다. 한마디로 정조, 그 세손 시절의 이산을 '우유부단하고' '소(小-효심)를 생각해 대(大-국가기강)를 놓치는' '나약한' 젊은이 정도로 그리는 것이다.
이날 방송에서도 결국 시청자 가슴을 뻥 뚫어준 건 우리의 세손이 아니었다. 말 못하고 끙끙 앓는 세손 대신, 영조 앞으로 나가 사실을 직고한 '엄마' 혜경궁홍씨(견미리)였고, 예의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불호령을 내린 '할아버지' 영조였다.
연민하고 사려깊고 주저하는 인간미도 한두번이지, 이렇게 반복되는 세손의 '하릴없음'은, 정말 괜찮은 조선임금의 다사다난했던 세손시절을 보고픈 대다수 선량한 시청자들 입장에선 "영 아니올시다"이다. 극중에서 채제공(한인수)이 그랬다. "난 이런 주군을 모신 게 영광이네" 하지만 시청자들은? "우린 이런 주군을 보는 게 정말 짜증나네."
셋째, 방향을 잘못 잡은 작가적 상상력. '이산'은 '허준'이나 '대장금', '상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들은 남은 기록의 양이나 대중이 갖는 상식 수준에서 정통 조선왕조를 다룬 사극과 천양지차다. 따라서 이들 사극은 거의 현대극 수준에서 주인공들의 삶을 요리조리 요리하며, 때로는 절절 멜로를 넣고, 때로는 코믹조연들의 과다한 활약상을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역사적 큰 팩트에만 벗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칭송이 따르는 그런 구조였다.
하지만 '이산'은 아니다. 영정조를 다룬 사료들만 봐도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차고 넘친다. 그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좁다는 것이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은 분명 '허준'이나 '대장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발휘됐어야 했다. 그것도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정조임금이라면, 그 상상력이란 건 더욱 엄밀하고 진중하며 감칠 맛이 났어야 했다.
'이산'은 그런데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허준' '상도' 등과 뭐가 다른가. 주인공의 빈약한 출신 배경과 인맥, 매번 당하는 정의파 주인공, 이에 비해 펄펄 나는 안티 히어로, 그럼에도 결국은 승리하는 인간미와 후덕함과 리더십을 갖춘 우리의 주인공..
하지만 최소한 이날 방송에서 보여준 '이산'의 상상력이란, 세손이 하는 일이란 게 하도 답답해 낚시하는 홍국영,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여서 주막에서 술만 마시는 박대수(이종수), 세손의 서슬퍼런 협박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안티 히어로 정순왕후의 창백한 얼굴 뿐 아니었나. 과거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이 보여준 그 강렬한 스트레이트 사극의 매력은 다 어디로 갔나.
넷째, 요즘 창궐하는 '뻥사극'에 대한 실망감. 송연(한지민)과의 멜로, 홍국영과의 극적인 만남, 정순왕후와의 뜨거운 배틀, 영조의 눈물나는 부성애..이 정도는 드라마인 '이산'의 필수요소였고 최대의 볼거리였다. 시청자도 이 정도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관대히 바라볼 줄 알았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정말 이런 일이 역사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과도한 상상력의 몇몇 에피소드는 시청자들이 사극을 떠나게 하는 악의 부메랑이다.
사도세자(이창훈)가 남겼다는 그림에 대한 다빈치 코드적 접근, 정순왕후 화완옹주(성현아) 정후겸(조연우)을 앞세운 대신들의 백주대낮 무혈 쿠데타, 세손과 홍국영의 너나없는 말투와 관계..이런 장면과 설정에 한두번 솔깃할 수는 있어도 검증되지 않은 이러한 사건사고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드라마의 굵직한 스토리가 진행된다면 이는 분명 문제다. 그러다 "아님 말고"라는 식으로 나중에 뒤집어버리면 남는 것은 시청자들의 '울분'과 '공허함'뿐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독살사건'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지난달 1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시원한 지적을 해줬다. 이 소장은 "사극 작가의 상상력이란 사료와 사료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우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며 "특히 생존했던 사람들을 그리는데 (작가의) 상상력이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요즘 사극이란 사극을 빙자한 공상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사극은 사실 그대로를 보여줘도 재미있다. '용의 눈물'은 정사에 바탕을 뒀지만 시청률이 제대로 나왔지 않느냐. 실록이라는 사료에서 너무 궤도를 이탈해서 다른 걸 그리면 곤란하다"고 밝혔다.
다섯째, 연기자들의 반복되는 연기패턴. 세손의 천편일률적인 목소리 연기가 그 대표적이다. 역대 사극이 보여준 임금의 목소리('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유동근)의 카리스마 보이스 톤을 떠올려 보시라!)와는 동떨어진 서민적이며 나긋나긋한 세손의 목소리. 처음엔 이게 매력이었고 차별이었다. 하지만 국본인 자신을 내치려는 명백한 무혈 쿠데타가 벌어졌어도, 추상같아야 할 그의 목소리 톤은 도저히 올라가는 법이 없다. 앞서 군사들을 마당에 도열시켜놓고 일장 연설을 할 때도 그 성량은 세손의 장대함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드라마 인기를 이끌었던 일부 연기자들의 존재감 상실도 시청자들이 지루해하는 이유중 하나다. '어록'까지 탄생했을 정도로 그 인기 좋았던 홍국영, 어렸을 적 세손과 거의 동고동락하다시피했으며 다빈치 코드를 푼 결정적 주인공 송연, 한때는 뭔가 큰 일을 할 것처럼 무과에 도전해 당당히 일을 낸 박대수, '이병훈 사극'의 영원한 감초 연기자 지상렬..이들이 점점 '이산'에서, 시청자 마음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산'의 갈 길은 촘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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