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우는 늘 살얼음을 걷던 배우였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 위를 조심스레 짚으며 걷고 또 걸었다. '혈의 누' 이후 내리 8편을 쉬지 않고 소화했다. 호평과 악평을 오가며 늘 다음 작품에 목말라했다. 좇는다기보다 늘 쫓기는 듯했다.
그만큼 박용우는 연기에 목말라했다. 94년 MBC 공채 탤런트가 됐을 때만 해도 그는 연기에 그리 큰 갈증은 없었다. 그랬던 박용우는 어느 순간 연기에 매몰되다시피 했다. 절대강자가 되고픈 욕심에 사로잡혔다.
사실은 연기에 대한 갈망보다 외로움 탓이 더 컸다. 그는 외톨이였다. 주위의 관심을 끌려 일부러 자살골을 넣을 만큼 사람에 대한 갈증이 많았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소리는 "착한 척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박용우가 연기에 천착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그는 웃기고 어수룩하고 착하고 매력적이며 듬직하게 변신했다. 그는 '머글'이지만 연기할 때만은 폴리주스를 마신 '마법사'였다.
그랬던 박용우에게 '핸드폰'(감독 김한민, 제작 씨네트리)은 처음을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다. 박용우는 '핸드폰'에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 불만을 처리하는 담당자를 맡았다. 욕을 먹어도 웃고, 하기 싫어도 웃는 '찌질한' 남자를 연기했다.
우연히 여배우 섹스 동영상이 담긴 매니저의 휴대전화를 주웠지만 그가 원한 것은 단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었다.
박용우는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던지던 질문을 '핸드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새삼 떠올렸다"고 말했다. 왜 난 이렇게 쓸쓸할까, 왜 이리 친구가 없고 허전할까, 박용우는 '핸드폰' 시나리오를 읽고 잊었던 감정을 되살렸다고 했다.
그는 "늘 자신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 감정 노동자 역을 맡았다. 배우 역시 감정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나도 자유의지를 죽이고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제 작품에 선택당하기 보다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위치에 올랐다기보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연기를 잘하면 되지 왜 상대와 연기를 어떻게 하겠다고 이야기해야하나 싶었다. 그건 사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어느 순간 소통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소통이란 대화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것도."
박용우는 '핸드폰'에서 철저히 이중적인 연기를 할 수 있었다. '공공의 적'의 이성재처럼 겉과 속이 다른 멋진 장르 캐릭터를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화로 상대를 능멸할 때조차 손을 벌벌 떠는 빈약한 남자를 보여줬다.
'핸드폰'은 생활 스릴러며, 그러기 위해서는 장르적인 것을 버려야 한다는 김한민 감독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소통을 했기 때문이다. 박용우는 "싸이코 패스처럼 연기했다면 멋있는 악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날 버려야 영화에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용우는 영화 속에 좀처럼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손을 떤다. 분노를 터뜨려야 할 때도 뱉지 못하고 손을 떨고, 끊임없이 수술비를 보태야 하는 어머니를 볼 때도 손을 떤다. 박용우는 구름 위를 걷는 '루저'처럼 구부정하고 억눌린 남자를 완벽히 묘사했다.
"나 역시 연기를 하지 않고 직장을 그냥 다녔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다. 아니면 히키코모리(은둔형 폐인)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용우는 연기로 구원을 얻었던 셈이다. 그는 "억눌린 감정을 연기를 통해 발산할 수 있었던 게 진심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박용우는 멈추면 넘어질 것처럼 쉼 없이 작품을 찍었다. 그는 "나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 쏟아내고 싶어도 쏟아낼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별해서 하기보다 나를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혈의 누' 이후 9번째 작품인 '핸드폰'을 찍은 지금, 그는 결국 정답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소모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중요했겠지만 표피적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감정 노동자였던 그를 좀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든 것은 현재 연인인 조안도 한 몫한다. 박용우는 "한때는 절대강자가 1순위였지만 지금은 3~4위로 밀렸다. 물론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1순위는 사랑이다"며 웃었다.
박용우는 "서로가 닮아가는 게 고맙고 비슷해지는 게 행복하다"며 연인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와 연기와 사랑이 지금의 박용우를 더욱 행복하고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살얼음을 걷던 박용우는 이제 땅에 발을 굳건히 딛고 걷는다. 이제는 폭도 더 넓다. '원스어폰어타임' 이후 '핸드폰'까지 8개월을 보냈다. 예전이라면 가질 수 없었던 여유다.
박용우는 "욕심은 더 커졌다. 그런 만큼 자연스럽게 신중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신중한 게 나중에는 잘못된 선택일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피하고 쉽지 않다"고 했다.
박용우는 유쾌하고 따뜻한 남자 이미지를 구태여 반복하지 않는 데 대해 "히든카드로 갖고 싶다"고 말했다. 이 작품이다 싶을 때 보여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또 그런 히든카드를 많이 갖고 싶다고 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아직도 많다. 여전히 연기를 한 뒤 스스로 깨작깨작한 느낌이 드는 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좀 더 깨지고 더 달리고 싶다."
<저작권자 © ‘리얼타임 연예스포츠 속보,스타의 모든 것’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