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그분'은 저 높은 곳에 계셔야 했다.
하녀 위에는 지체 높은 귀부인이, 그리고 방자 위에는 지엄하신 이도령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도망 노비를 좇는 추노꾼 위에는 아름다운 압구정 뷰(view)에 취하신 좌의정 대감이 서 계셨다.
그리고 '그분'들은 당연히 기존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이와 동시에 하녀나 방자, 추노꾼 등의 '루저'(Loser) 혹은 '마이너리티'는 이들 주연을 떠받드는, 벌써 몇 대째나 그 업을 대물림해온 조연들이었다.
칸영화제는 물론 국내 극장가에서도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나 6월3일 개봉을 앞둔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 이들이 기특하고 대단한 건 이들을 관통하는 루저들에 대한 엄정한 재평가, 혹은 루저들의 통쾌한 반란 덕분이다. 이는 시청률 30%대를 오갔던 KBS 인기사극 '추노'가 끈질기게 탐미했던 큰 마성의 유혹이기도 했다.
사실 스크린이나 TV는 거의 주기적으로 이 루저나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놀라운 혜안을 선보이곤 했다. 멀리는 이범수의 '정글쥬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박찬옥 감독의 '파주'가 그랬다. 3류 깡패의 진절머리 나는 삶을 그린 '똥파리' 역시 그랬고, 오합지졸의 눈물 나는 승전보 '국가대표' 또한 그랬다. 송강호 강동원의 '의형제'도 따지고 보면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루저들의 해피 엔딩 이야기다.
그러나 이 루저에 대한 '하녀'와 '방자전', '추노'의 사랑은 보다 직접적이다.
전도연 이정재 주연의 '하녀'가 60년 원작에 대한 리메이크이긴 하나, '하녀'라는 요즘 전혀 쓰지도 않는 말을 굳이 제목에 집어넣은 것부터가 도발이다. 그리고 그 하녀는 스쿠터로 배달을 다니며 나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 했던 젊은 여성이었고, 성(性)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히긴 했으되 되로 받으면 말로 꼭 갚는 당찬 인간이었다. 이에 비해 주인마님(서우)은 오로지 제 신분 유지를 위해 자존심이건 뭐건 다 버린 별 볼일 없는 기생 인간이었다.
'방자전'은 고대소설에선 조연에 불과했던 방자(김주혁)를 주연 이몽룡(류승범) 뺨칠 정도로 상석에 올려놓은 역발상의 쾌거다. 주인 도령 시키는 대로 그네 타는 춘향(조여정)에게 말심부름이나 하는 인물로만 알았던 방자에게, 한 여인을 남김없이 사랑할 만한 넓은 가슴이 있었던 줄 왜 진작 몰랐을까. 하여간 이 영화를 풀어가는 사실상의 내레이터도, 그리고 남원 현감으로 부임한 변태 변학도(송새벽)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한 여인 살려 달라 울부짖었던 이도 모두 방자였다.
장혁 김지석 한정수 그리고 성동일의 야생 짐승남들의 숨소리가 지금도 남아있는 '추노'는 또 어땠나? '대장금' '상도' '태왕사신기' '허준' 등 주인공들의 자수성가형 히트 사극을 수없이 보아오면서, 도망노비를 좇는 '별 볼일 없는' 추노꾼들이 주인공으로 재발견될 줄 알았던 시청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패가망신한 대길 장혁, 무과에서 떨어진 낙제생 최장군 한정수, 원래 그 바닥에서 누런 이빨만 자랑했던 천지호 성동일..이들 루저는 '추노'를 만나 뭐 하나 안 빠지는 위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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